책소개
〈논어고의>에 대한 반박과 〈주자집주〉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한 독창적인 논어주석
소라이는 일본학자이지만 주자 朱子 의 각종 학설에 정면으로 맞서, 고대의 유학경전, 즉 오경 五經 을 종횡으로 활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가 구사한 한문의 수준도 보통 학자들을 뛰어넘는 것으로, 일본을 넘어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소라이의 주장의 핵심은 송나라 유학자들의 주장은 모두 불교나 도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고대부터 전해져온 선왕 先王 의 도 道 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주장을 〈논어〉를 분석하고 주석을 단 〈논어징 論語徵 〉을 통해서 하나하나 입증해 보였다. 주자학에 대한 적극적인 반론, 〈논어〉에 대한 재해석, 그리고 고대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활용은 그가 동아시아의 차원에서도 보통의 학자수준을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사상은 소라이의 등장으로 비로소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논어징은 한마디로 〈논어〉의 주석서이다. 소라이가 자신의 고문사학적인 입장에서 〈논어〉를 해석하고 분석한 성과를 이 책에 주석으로 담은 것이다.
〈논어징〉은 송나라 유학자들의 〈논어〉에 대한 해석을 반박하고, 소라이 이전에 활약한 이토 진사이의 〈논어고의〉를 비판하였다. 소라이는〈논어〉이전에 출판된 것으로 판단한 ‘고문사 古文辭 ’의 경전, 즉 육경을 기준으로 〈논어〉를 해설한 것이 특징이다. 경전의 본문만을 읽고 또 읽고, 읽고 또 읽는 과정에서 의문점을 발견하고 그 의문을 스스로 풀어가면서 자신의 경학을 구축한 것이다. 선현들의 주석은 잠시 뒤로하고 자신의 문제를 철저하게, ‘독학 獨學 ’으로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그의 독창적인 경학이 성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논어징안에는 매우 ‘일본적인’ 사상과 관점들이 다양하게 동원되어 있다.
저자소개
에도시대 유학자, 사상가로 고문사학(古文辭學)을 창시하여, 독특한 일본 유학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일본사상사에서 최고의 사상가로 평가되기도
하는 그는 1666년에 에도[江戶], 즉 지금의 동경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궁정에서 일하는 의사였는데, 1679년에 당시 쇼군[將軍]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문책을 받고 가즈사노지방[현재의 지바현]으로 유배가 칩거하였다. 소라이는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한 그곳으로 가족을 따라가서 27세가 되던 1692년까지 살았다. 부친이 사면을 받은 덕분에 그는 비로소 가족과 함께 에도로 복귀할 수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이미 하야시 라잔[林羅山]가문에 입문하여 유학을 배운 소라이는 에도에서 젊은 승려들을 가르치다가, 우연히 쇼군의 총신이었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에게 발탁되어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꽃피울 수 있었다. 그러나 44세가 되던 1709년에 쇼군 쓰나요시가 사망하자, 오랫동안 소라이를 지원해주었던 야나기사와도 세력을 잃고, 실각하였다. 이 때문에 소라이도 공직생활에서 밀려났는데, 순식간에 생활의 근거를 잃은 그는 그동안 살고 있던 야나기사와의 저택에서 나와 니혼바시[日本橋] 가야바쵸[茅場町]에 학당[겐엔쥬크]을 열고 자립하였다. 그는 이 학당을 중심으로 학생을 모집하여 가르쳤는데, 이것이 소라이학파[겐엔학파]가 형성된 계기였다. 소라이학파는 개인의 도덕보다는 정치적인 상황과 제도를 중시하는 입장을 가지고 주자학을 비판하고, 유학사상을 연구하였다. 특히 소라이는 고대의 육경(六經)을 바탕으로 공자의 정치사상을 규명하고자 하였는데 그 성과가 『논어징(論語徵)』이다. 소라이의 제자로는 경제 이론에 밝은 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 시문에 밝은 핫토리 난가쿠[服部南郭] 등이 있었다. 소라이의 영향은 다산 정약용에게도 찾아볼 수 있는데, 소라이의 제자 슌다이는 특히 다산이 그의 글을 인용하는 등 존중한 학자였다. 소라이는 57세 때(1722년)에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신임을 얻어 그 자문이 되기도 하였으나 6년 뒤, 1728년에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변도(弁道)』, 『변명(弁名)』, 『논어징(論語徵)』, 『대학해(大學解)』, 『태평책(太平策)』, 『정담(政談)』, 『학칙(學則)』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