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바라본 아르헨티나 - 루이사 발렌수엘라 중단편선
한국에서 최초로 출간된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 여성작가 ‘루이사 발렌수엘라’의 단행본
‘라틴아메리카 여류작가’라고 하면 누가 떠오를까?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이사벨 아옌데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렇지만 외국 문단, 특히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루이사 발렌수엘라 Luisa Valenzuela, 1938~ 와 멕시코 출신의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를 대표적인 작가로 평가하는 추세다. 발렌수엘라는 포스트 붐 세대 작가들 중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꼽히며,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여성작가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도 발렌수엘라를 거론할 때에는 아르헨티나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형상화하면서 여성의 목소리를 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거론할 때뿐만 아니라 비교문학, 페미니즘 문학을 다룰 때에도 함께 연구된다.
발렌수엘라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악한 전쟁 Dirty War:1976~1983 ’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정권과 그 전후의 폭압적인 사회정치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작가가 대부분의 작품에서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공포 정치 상황을 다루면서 고문과 실종자들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동시에 여성의 몸에 대한 관심과 성찰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특히 에로티즘과 폭력의 관계에 주목하며 독재정권 치하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실상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폭로하여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발렌수엘라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발렌수엘라는 군부정권의 폭력 앞에 신음하는 국민을 단순히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군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아르헨티나 국민의 직간접적인 동조와 묵인, 침묵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자유에 대한 의지, 역사의식을 줄기차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의 입장으로 치우치지 않는 점은 페미니즘의 성격이 짙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발렌수엘라는 처녀작인 〈웃어야 한다〉에서부터 억압당하는 주인공을 이상화하거나 억압자를 비난하는 단순한 구도로 작품을 진행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녀의 목표는 희생자가 어떻게 가해자와 공모하는가, 희생자와 가해자가 개인 및 집단의 상징으로서 인간의 어두운 면을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주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렌수엘라의 작품이 무거운 분위기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패러디, 블랙유머, 언어유희, 연극적 상황 등을 도입하여 진지한 주제의 내용에 유머와 위트를 함께 섞고 있다. 2010년 9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출간된 발렌수엘라의 단행본인 〈침대에서 바라본 아르헨티나〉에서는 섹슈얼리티와 군부에 의한 폭력을 함께 다루면서 인간의 부조리, 권력에 대한 욕망, 정치권력과 문화권력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편 인간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랑 넘치는 발렌수엘라의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