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메아리 :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23
다섯 작가의, 다섯 가지 메아리
표제작인 오채 작가의 「그날의 메아리」는 일본군에게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은덕’이가, 자매와 같던 언니의 독립운동을 지켜보다 함께 그 길에 서게 되는 이야기를 그렸다. 부모가 죽고, 언니가 잡혀가도 가슴에 나는 천불을 어쩌지 못해 태극기를 들고, 원수 왜의 군대 앞에 두려움을 무릅쓰고 ‘독립 만세’를 외치는 은덕의 모습은 ‘사랑’으로 무장되어 있기에 누구보다 힘 있고 당당하다. “은덕아, 용기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야. 두려워도 행동하는 거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곳곳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질 걸 생각하면 행복해. 저들은 총과 칼로 나오지만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가는 거야.”라는 언니의 말이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정명섭의 「소난지도에서 제암리까지」는 군인으로서 일본군에 맞서다 군대가 해산된 뒤 의병활동을 하던 홍원식의 활약상이 생생한 묘사로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홍원식을 따라가며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들이 전멸당하는 모습들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군대와 헌병, 순사들이 동원되고, 바다를 무대로 삼은 의병들을 토벌하기 위해 수뢰정까지 동원하는 치밀함에 의병들은 속수무책으로 전멸당했고, 그들을 도와줬다는 명목으로 마을들이 쑥대밭’이 되다 결국에는 마을의 젊은이들이 학살당하는 마지막 장면은 사무치는 아픔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홍원식같이 끝까지 저항했던 이들에게 진 빚을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한다.
박정애의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는 중국의 충칭 남쪽 강 건너 난안 단쯔스라는 곳의 쑨자화위안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둔 두 자녀 ‘능이’와 ‘길성이’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독립운동가 아버지에 의해 고아원에 맡겨질 정도로 신산한 삶을 살아내야 했던 어린 생명들의 삶을 잔잔한 문체로 보여준다. 중국 아이들에게 ‘가오리 왕거누(코리아 왕거누亡國奴-나라가 망하여 침략자에게 예속되어 있는 국민)’라고 놀림을 받으면서도 일제가 패망하고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한글을 배우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그려지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설흔의 「A-BCDEF」는 1919년 3월 당시 A부터 F까지 인물의 서로 다른 진술의 교차를 통해 그날의 모습을 다각적으로 그려낸 흥미로운 작품이다. A부터 F는 당시 YWCA의 총무,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둔 사내아이, 숭실중학교 학생, 경성의전 학생, 직업혁명가 들로 그들의 눈에 각기 다르게 묘사되는 서로 다른 ‘그날’을 그려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이름 없이 알파벳으로만 등장하는 인물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하나 개성이 또렷하고 섬세하게 그려져 어떤 이름보다도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삼일운동에 대한 작가 나름의 성실하고도 의미 있는 재구성을 통해 각기 다르게 그려지는 ‘그날’을 ‘하나의 그날’로 사유해가는 즐거움은 작가 설흔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이라 할 것이다.
하창수의 「어느 조선인 일경의 기이한 변절」은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돼 취조를 받다 폭행과 살인적 고문으로 중상을 입은 피의자들이 네 명의 경찰을 고소한 일이 있었는데, 이 네 명 중에 김면규라는 조선인 형사가 포함”되어 있던 사실을 모티브로 출발한 소설이다. 작가는 일본의 충직한 ‘개’라 해도 시원찮을 조선인 형사 ‘장만석’이 형사로 산 7년 세월을 걸고 추적하던 ‘유익건’이라는 독립지사를 체포한 뒤 겪는 심리 변화를 세밀하게 따라가며 ‘조선’ 땅에서 ‘일경’으로 살았던 ‘장만석’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역사가 일상이 되기 위해
『그날의 메아리』에는 3.1운동 당시의 모습은 물론, 독립운동을 하던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다. 독립운동가는 물론 독립운동가의 아이들과, 당시의 지식인으로 독립운동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인물과 그 모든 조선인들의 대척점에 있는 일제와 그 밑에서 일제에 찬동하던 조선인들까지 저마다의 역할과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독자들에게 말을 건다.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정명섭 작가의 말처럼 그 모두에게 어떤 형태로든 빚을 지고 있지 않을까? 3.1운동 100년이 된 2019년, 여기 다섯의 작가들이 우리들에게 환기시켜주는 ‘그날의 메아리’에 함께 귀 기울여 들어보기를 권한다.
20세기 초 백인이 다수인 국가에서는 흑인들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며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펼친 미국의 흑인지도자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는 “역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뿌리가 없는 나무와도 같다”는 말을 남겼다.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앎의 깊이를 가져야 든든하고 깊게 뿌리내린 나무가 될 수 있을까? 의무교육기간 12년 동안 ‘국사시간’에 배운 역사만으로 충분할까? 내가 내릴 수 있는 답은 “아니다”이다. 깊고 든든히 뿌리내린 나무에 비유할 수 있으려면 역사가 일상이 되어야 한다. 지나간 시간을 거울삼는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역사는 매일 자신의 매무새를 가다듬는 거울처럼 들여다보아야만 진정으로 역사를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와 가장가까이에 있는 근현대사는 더더욱 그렇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에 비장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오늘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어느 조선인 일경의 기이한 변절」하창수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