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 인류의 저주이자 축복, 질병이자 치료제, 숙명이자 구원, 인간의 스토리텔링 본성을 찾아서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 인류의 저주이자 축복, 질병이자 치료제, 숙명이자 구원, 인간의 스토리텔링 본성을 찾아서

저자
조너선 갓셜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출판일
2023-04-20
등록일
2024-01-19
파일포맷
COMIC
파일크기
2KB
공급사
우리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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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야기꾼이 세상을 다스린다.
이야기꾼을 모조리 추방하라! ”
플라톤이 태어난 기원전 5세기경 고대 그리스는 ‘살육의 시대’였다. 당시 아테네는 대역병(Plague of Athens)과 잔혹한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은 아테네인을 극한의 분열로 몰아붙였고,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곧바로 내전에 돌입했다. 찬란했던 민주정이 막을 내리고, 스승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많은 목숨을 앗아간 중우정치가 고개를 들었다. 이로 인해 플라톤은 정치가의 꿈을 접고 철학자가 되어, 2400년 동안 명성을 떨칠 주저 《국가》를 집필한다. 한데 ‘이상국가’ 건설에 대한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조목조목 담은 이 책의 마지막 권에는 뜬금없지만, 의미심장해 보이는 대목이 등장한다. 유토피아에 이르려면, “이야기꾼(시인)을 모조리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플라톤은 왜 아테네의 멸망을 보며 이야기꾼을 내쫓으라고 갈파했을까? 그때 그는 무엇을 봤던 걸까?(66~70쪽)
그로부터 2400년 후 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해 ‘이야기 과학’을 연구하는 영문학자 조너선 갓셜은 코로나19의 대유행, 계속되는 전쟁, 포퓰리즘 선동가의 부상, 불평등과 양극화로 인한 계급적 긴장, 그리고 각종 궤변 때문에 동일한 현실을 보지 못하는 탈진실 세계의 도래를 보며 의문을 품는다. 인간의 생존과 진화를 보장한 연장인 ‘스토리텔링 본성’이 오늘날 인류를 파멸로 몰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실은 ‘이야기’가 세상에 수많은 혼돈, 폭력, 오해를 일으키는 주범인데,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대로 흘러가게 그냥 둔다면, 플라톤이 목도했던 것을 나도 보게 되는 게 아닐까?
그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플라톤의 마지막 메시지처럼 이야기꾼을 모조리 추방할 순 없었다.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본성이므로 그건 또 다른 종말을 의미했다. 갓셜은 ‘이야기 과학’ 연구자답게 문학, 사회학, 철학뿐 아니라 진화심리학과 신경생물학에서 근거를 가져와 인류를 설득할 작품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물론 사람을 구워삶는 데 이야기만큼 힘이 센 것은 없으므로, 작품의 서술 방식은 당연히 ‘이야기’다.

“진화는 이야기를 위해 마음을 빚었고,
마음은 이야기에 의해 빚어진다”
갓셜의 이런 주장에는 사실 꽤 근거가 있다. 일단 그 근거이자 이 책의 주제 중 하나인 ‘스토리텔링 본성’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1908년, 모험가들이 프랑스 튀크 도두베르 동굴에서 진흙으로 빚은 들소 형체를 발견한다. 동굴 입구에서도 강물을 건너고 수직굴을 기어 올라 1킬로미터는 가야 볼 수 있는 이 진흙 들소는 약 1만 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이 들소 두 마리가 종교적 성격을 띄고 있다고 발표했는데, 통로 주변의 어른과 아이들의 발자국으로 신, 정령, 기원, 종말 등 부족의 소중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부족원들이 이곳을 찾았음을 알아냈다(274쪽). 이 연구는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는 스토리텔링이 인류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된 본성이라는 것. 둘째는 우리가 이야기를 탐닉하기 위해 목숨도 거는 종이라는 것.
인간의 본성 깊숙이 새겨진 ‘이야기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강력해서 인류의 진화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어떻게 이 모든 지혜를 이해 가능하고, 전달 가능하고, 설득 가능하고, 실행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 한마디로 어떻게 착 달라붙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되고 해법이 발견되었다. 스토리텔링이 해법이었다”라는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의 말처럼(46쪽), 인류는 이야기를 통해 지식을 전수하고, 서로를 설득해 이해를 증진했으며, 공감을 강화하여 집단을 결속했다. 그렇게 문명을 건설했다.
인류의 이야기 사랑은 수만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력해졌다. ‘이야기’ 같은 고리타분한 것에 요즘 누가 관심을 쏟느냐고 반문하기 전에 당신의 일과를 되짚어보라. 당신은 교재나 책, 뉴스기사를 읽는 데 몇 분을 쓰는가? 리얼리티쇼, 시트콤, 다큐멘터리 등을 보는 데는? 소셜미디어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일별하는 데는? 게임을 하는 데는? 대중가요나 팟캐스트나 오디오북을 듣는 데는?
기술 발달 이전에는 춤, 노래, 미술, 대화 정도가 이야기의 전부였지만, 오늘날 인간은 비대면으로도 24시간 내내 계속되는 ‘이야기 과잉 시대’에 산다. 물론 이야기가 문명을 발전시킨 것처럼 좋은 쪽으로 힘을 발휘한다면, 전혀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야기에는 양면성이 있어서 어두운 측면으로도 얼마든지 작동할 수 있다. 이야기꾼이 그렇게 마음만 먹는다면 말이다.

‘이야기 과학’의 핵심 ‘서사이동’부터
‘이야기에 빠진 뇌’의 비밀까지
이야기의 다크 포스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에겐 풀어야 할 의문이 하나 남아 있다. 그것은 대체 인간의 ‘뇌’와 ‘이야기’에 어떤 메커니즘이 숨어 있기에 우리를 쥐락펴락하느냐는 것이다.
‘이야기 과학’의 핵심을 하나 꼽자면, ‘서사 이동(narrative transport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사이동이란 “책을 펼치거나 텔레비전을 켜고 일상에서 벗어나 대안적 이야기 세계로 정신적 순간이동을 하는 미묘한 감각”을 말한다(52쪽). 우리가 이것을 경험할 때는 몇 가지 현상이 잇따른다. 첫째, 서사이동을 할 때 우리는 현실 세계뿐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분리된다. 둘째,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이야기의 주인공과 동일시하고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을 잊는다. 셋째, 이를 통해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기도 한다(52쪽). 이렇게 우리는 이야기에 ‘빠진다.’
이야기가 강력할수록 우리는 주인공에 깊이 이입해 허구에 대한 불신을 유예하고(61쪽), 강렬한 감정을 활성화하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119~120쪽). 한마디로 우리는 ‘설득’당한다. 《뿌리》의 쿤타킨테를 보고 흑인에 대해 관대해진 것도, J.K. 롤링의 《해리 포터》를 읽고 소외된 ‘타자’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줄어든 것도(186쪽), 약 2000년 전 한 줌의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을 널리 퍼뜨려 오늘날 기독교 인구가 전 세계 31.5%를 차지하게 된 것도 다 이 덕분이다(121~128쪽).
그런데 서사이동에도 치명적인 양면성이 있다. 서사학 교수 톰 판라르(Tom van Laer)에 따르면 “서사이동은 신중한 판단과 논증 없이도 지속적 설득 효과를 낳는 정신 상태”다. 즉, 엄청나게 잘 만들어진 이야기가 있다면, 인간의 합리적 사유 능력을 ‘무력화’한 채, 정보와 믿음을 ‘주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54쪽). 그것이 파벌적 단합을 부추기는 선동이나 구매 권유, 《나의 투쟁》 같은 소수 집단에 대한 악의적 메시지일지라도 말이다(100쪽).
실제로 ‘이야기에 빠진 뇌’에 대한 비밀을 푼 학자, 기업, 종교인, 정부기관들은 이미 디지털 데이터를 수집해 더 솔깃하고, 더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궁극적으로 더 큰 설득력을 발휘하는 맞춤형 서사를 우리에게 공급하고 있다(101~104쪽). 러시아는 이를 ‘전술’로 사용하고, 중국은 ‘정책’에 반영하며,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소셜미디어, 각종 온ㆍ오프라인 광고, 그리고 뉴스기사, 음모론과 사이비종교, 카더라 소문까지, 이는 예외 없이 적용 중이다.

스토리텔링의 ‘보편문법’과 ‘흑마술’
물론 이 맞춤형 서사를 주입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머릿속의 자물쇠를 열어 서사이동의 황홀경에 빠뜨릴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전제가 따른다. 그러나 갓셜에 따르면 ‘성공하는 스토리텔링의 기본 요소’는 매우 단순하다. 또한 놀랍게도 원시시대 구술 민담부터 현대의 유튜브 쇼츠에 이르기까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모두가 궁금해할 그 비법은 단 두 가지다. 첫째, 이야기는 말썽에 관한 내용일 것. 둘째, 이야기에 깊은 도덕적 층위가 있을 것(152쪽).
수렵채집 생활의 황금률은 무척 단순했다. “집단을 단결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라. 집단을 분열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지 말라.” 이야기의 보편문법은 이런 원시적 집단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부족은 ‘시적 정의’라는 주제의 이야기를 끝없이 되풀이함으로써 ‘이기적 악인’보다 ‘이타적 선인’이 더 큰 보상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강 건너 부족을 ‘악마화’해서라도 경쟁에서 이기게 하고 집단을 결속시켰다. 그리고 이 옛 이야기꾼의 후손인 우리가 땅을 물려받았다. 문제는 이렇게 오래된 우리의 스토리텔링 본성이 현대 사회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해 ‘격차’가 생겼다는 것이다(193~194쪽).
우리의 서사심리가 진화하는 내내 조상들은 작은 공동체를 이뤄 살며 혈연, 언어, 민족, 그리고 같은 문화적 정체성 이야기에 의해 하나로 뭉쳐 있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현대인들은 다민족, 다문화 사회에 살며, 셀 수 없이 다양한 정체성으로 갈가리 찢겨 있다. 한쪽에선 ‘말썽’과 ‘권선징악’이란 보편문법에 맞춰 자신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입시키고, 다른 쪽에선 그것을 이용해 타자에 대한 ‘적의’를 부추긴다. 테크의 발달로 우리는 편향된 ‘이야기우주’에 24시간 틀어박혀 살며, 자신이 솔깃한 이야기들을 주변인들에게 끝없이 공유한다. 이제 인류는 같은 현실에 살면서도 다른 것을 보는, 탈진실의 ‘인포칼립스(Infocalypse)’에 들어섰다(264쪽).

“호모 픽투스여,
새로운 모험을 떠날 시간이다”
오늘날 문명이 실존적 위기를 맞았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여러 학계에서 다양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만, 우리는 ‘이야기’라는 낱말이 주는 호감과 무해함 때문에 그것이 원인임을 추호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갓셜이 이 책을 내놓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슬기로운 동물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이야기에 중독된 동물 ‘호모 픽투스’임을 자각시키기 위해서.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과 사회에 작용하는 은밀한 방식을 똑똑히 알리고, 각성시키기 위해서. 인문학과 과학에서 연구된 탄탄한 학문적 근거에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야기’를 엮어 넣어 그는 이 책을 썼다. 만약 갓셜의 이야기가 우리를 서사이동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책장을 덮고도 그의 메시지를 기억할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의분(義憤)를 일으킬 때, 그 이야기꾼이 과장, 위조, 비논리 같은 허튼소리를 끼워 넣은 건 아닌지 의심할 것이다. 그것이 설령 자기 자신일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인류는 플라톤이 본 광경을 또다시 목도하지 않을 수 있다.
갓셜이 제안하는 것은 현생인류가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모험’의 길이다. 힘겨운 도정을 떠나는 호모 픽투스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그가 제안하는 너그러운 경험칙을 남긴다(285쪽).

이야기를 증오하고 거부하라.
하지만 이야기꾼을 증오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라.
그리고 평화와 자신의 영혼을 위해,
이야기에 말 그대로 반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자들을
경멸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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