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나의 죽음에 동의합니다 - 있는 힘껏 산다는 것, 최선을 다해 죽는다는 것
존엄성을 잃지 않고 평화롭게 떠나는 것,
환자와 그들이 삶에 두는 의미를 존중하는 것
여든 넘은 의료 조력 사망 시행 의사의 고뇌와 다짐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고찰
2015년 캐나다 대법원은 의료 조력 사망을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고, 40년 넘게 가정의로서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던 진 마모레오는 그 순간 자신의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그는 스스로 커리큘럼을 짜서 훈련하며 의료 조력 사망 시행 의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고, 지금까지 7년여 동안 많은 환자들이 희망하는 생의 마지막을 도왔다. 《기꺼이 나의 죽음에 동의합니다》는 그가 그동안 조력 사망 시행 의사로서 만났던 환자들, 통증과 불안, 외로움 등 그들이 죽음을 결심하는 수많은 배경,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신념, 또 가족의 고충, 의사로서 겪은 시행착오와 갈등, 의료 조력 사망이 가능한 자격 조건과 최신 정보, 그리고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생각한 앞으로 나아갈 방향 등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 책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다루고 있지만, 죽음 자체나 죽음의 순간에 몰입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의 마지막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그들의 고민과 결정에 대해, 그리고 ‘죽음의 사신'이 되어 그들의 삶을 끝내는 ‘시행자’ 역할을 하는 저자의 인생과 결의에 집중한다. 그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의료 조력 사망의 제도적 의의, 그 선택지가 누군가에게는 삶의 위안 혹은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더 이상 나 같지 않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잖아”
눈을 감는 날까지 나로서 있고 싶은 이들
#1 희귀 폐 질환을 가진 과학자 욜란다는 매일 마치 운동한 것처럼 가쁘게 숨을 쉬며 살았다. 숨쉬기 연습만 하다가 하루가 끝나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그는 이제 때가 됐다고 생각했고, 혼자서 자신의 죽음을 위해 수많은 서류 작업을 시작했다. #2 환갑이 넘어 루게릭병에 걸린 조의 자살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의료 조력 사망의 합법화 뉴스를 들은 그는 희망에 차서 본격적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못 만났던 친구들을 부르기도 하고, 의료진과 끊임없이 대화했다. 루게릭병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장기 기증 절차도 마쳤다. #3 치매에 걸린 실라는 매일 조금씩 자신이 아는 단어를 잊어버렸고 동시에 자신을 잃어갔다.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의료 조력 사망을 원했지만, 그녀의 의료 결정권을 가진 딸이 반대했다. 몇 년 후 실라의 딸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의 대부분은 우리 엄마가 아니에요.”
‘의료 조력 사망(Medical Assistance in Dying)’은 의료진과 약물의 도움을 통해 이르는 사망을 말한다. 현재 약 12개 국가 내 30여 개 자치구에서 의료 조력 사망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삶이 한 단어로 축약되어 표현될 수 없듯, 죽음도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각기 다른 죽음의 이야기가 있다. ‘의료 조력 사망’이라는 말 하나로 그들의 죽음을 분류하고, 한데 뭉뚱그려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기꺼이 나의 죽음에 동의합니다》에는 자신의 죽음에 동의한 여러 ‘사람’이 등장한다. 누구는 죽음에 성공하지만 누구는 실패한다. 어떤 이는 가족과 친구의 웃음소리 속에서 눈을 감지만, 어떤 이는 철저하게 혼자다. 저자는 자신이 겪은 여러 죽음의 모습과 죽음을 선택한 이의 삶, 가치관, 죽음에 동의하기까지의 과정 등을 이야기하며, 그들 역시 우리처럼 열심히 삶을 살아내고 치열하게 본인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임을 말한다. 의료 조력 사망은 특별한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배경이다. 주인공은 그 배경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우리다.
“난 누군가를 마음에 들인 후 그들의 생명을 중단시켜야 한다”
아무도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짐을 흔쾌히 짊어진 이들
“의료 조력 사망은 고위험 의료 행위입니다.” 이는 환자가 아니라 시행 의사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응급 대원이나 소방관이 일하는 중에 사망자가 발생하면 전문가와 상담해야 하듯, 조력 사망에 관여하는 의사 역시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것. 새로 시작한 일을 잘 해내겠다는 마음만으로 달려온 저자는 한 강연에서 이 같은 얘기를 듣고 눈물이 터져 그 자리를 뛰쳐나갔다. 그리고 무작정 달렸다. 그는 당시 조력 사망 업무를 피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것을 떠올리며 그때 번아웃을 겪은 게 아니었을까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은퇴하는 시점에 다음 커리어를 찾아 누군가의 ‘마지막 의사’가 되어 열정적으로 일한 저자에게는 일에 대한 사명감과 보람도 있었지만, 그만큼 외로움과 슬픔,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무력감도 느꼈다. 그는 복잡한 내면과 자신의 ‘짐’을 받아들이고 극복해가는 과정을 책에 솔직히 담았다. 또 이제 80대에 이른 저자는 여느 의사라면 쉽게 경험하지 못할 생애 말기에 대한 시선도 전한다.
보통 의료 조력 사망 제도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죽음을 택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기꺼이 나의 죽음에 동의합니다》는 이들 외에도 오직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의해 자원봉사로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 그 외 검시관, 요양보호사, 병원 관계자 등 많은 사람이 함께 얽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저자는 그간의 여러 경험을 언급하며, 한 사람이 그토록 원하는 죽음은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세상에 뿌리내려 살아낸 한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을 이야기할 때는 온 사회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법이다.
“좋은 죽음은 그냥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누구의 삶도 사소하게 대하지 않는 우리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의료 조력 사망’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지는 않는다. ‘존엄사’ 혹은 ‘안락사’라는 말이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의료 조력 사망의 법제화 움직임이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진행되면서 조금씩 이 문제에 대해 본격적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 법률을 마련한 캐나다의 상황은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캐나다에서 의료 조력 사망이 시작된 해부터 시행 의사로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만난 여러 환자들을 떠올리며, 제도의 장점과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동안 어떤 식으로 제도가 보완되어 왔는지, 또 앞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등을 차분히 서술한다. 또 자살 방조 혹은 강요에 제도가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철저한 법 조항들도 명시하고 있다.
의료 조력 사망으로 죽는 이들의 비율은 제도가 합법화된 나라들에서 거의 매년 2~4퍼센트로 일정하다고 한다. 제도가 생긴다고 갑자기 더 많은 이들이 죽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제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딘가에는 분명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가 자신의 환자 중 가장 이상적인 의료 조력 사망의 사례로 꼽은 조도, 의료적 트랜지션을 시행한 스물여덟 살의 애슐리도, 친화력과 사회성이 좋은 소어도 의료 조력 사망 요청이 거부당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받아들여질 때까지 계속 신청했다.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죽음을 위해 노력했다. 나 자신을 잃기 전에 나로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은 개인, 그에 대한 이해와 존중, 비록 소수의 의견일지라도 귀를 기울이는 성숙한 사회. 아마 의료 조력 사망의 진정한 의의는 죽음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상황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