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메일스
모든 사람은 여자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를 싫어한다
우리 안의 지울 수 없는 여성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부 다 여자다. (…) 나는 여자다. 그리고 당신, 친애하는 독자여, 그대도 독자다. 당신이 여성이 아니라 해도, 아니라면 더더욱. 환영한다. 유감이다._서문에서
《피메일스》의 서문은 안드레아 롱 추가 계승하고자 했고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던 단 한 사람, 발레리 솔라나스의 말하기 방식을 빌려 쓰였다. 주요한 페미니즘 텍스트로 읽히는 솔라나스의 《SCUM 선언문》은 모든 남성을 불완전한 상태의 여성으로 바라보고 남성의 절멸을 제안한다. 용감하고 공격적인 남성과 유약하고 의존적인 여성이라는 전통적인 남녀 특성 구분을 남성의 거대한 사기극이라 주장하며, 자신의 수동성을 증오한 나머지 여성에게 그 수동성을 투사해온 남성들을 학살함으로써 페미니즘 혁명을 일으키고자 한다.
롱 추는 《SCUM 선언문》의 모순을 지적하며 남성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여성이라고, 존재한다는 것은 곧 여자female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여자란 생물학적 성별이 아닌 보편적인 실존 조건으로서 “타인의 욕망에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자아가 희생되는 모든 심리적 작용”이다. 여기에서 언뜻 말장난으로 보이기도 하는 롱 추가 반복하는 논지, “모든 사람은 여자고 모든 사람이 이를 싫어한다”가 출발한다.
솔라나스의 주장은 그간 페미니스트들에게 가해진 유서 깊은 비난, “페미니즘은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바로 그만큼 여성혐오를 표출한다”와 상통한다. 역사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비난해온 구실-허영, 굴종, 성적 수동성-을 그대로 가져다 남성 절멸의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롱 추는 솔라나스가 남성을 혐오하는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대부분의 여성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특히 솔라나스가 ‘아빠의 딸’이라 부른 존재들, 남성에게 속아 전통적인 여성성을 제 것으로 삼고 스스로 남성의 억압 체제에 속하기로 한 여성들은 〈니 똥구멍이다〉에서 ‘똥 잘 먹는 여자’로 그려지기까지 한다. 결국 《SCUM 선언문》은 남성 절멸 이상으로, 모든 인간을 전통적인 여성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솔라나스를 제외한 모든 인류, 바깥의 욕망을 내재화한 모든 이를 ‘여자’라 말하면서.
“혼란스러운가. 괜찮다. 발레리도 그랬다”고 롱 추는 쓴다. 이 알 듯 말 듯하고 혼란스러운 ‘공들인 농담’을 《피메일스》는 충실하게 계승한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물론 퀴어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도발적인 롱 추의 주장은 “얼핏 ‘말장난’에 심취해 ‘피아 식별’에 실패하는 것으로 보인다.” 트랜스 혐오를 옹호하는 것 같은 한편 트랜스 배제적 페미니스트의 주장을 가볍게 비꼬아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과장하고, 비약하고, 단언하고, 거부하고, 비꼬고, 농담하는 《피메일스》의 수사학적 궤변 또는 ‘우스갯소리’”는 스스로의 양가감정을 끝까지 좇는 솔라나스의 정신을 유산으로 삼아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를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하는 존재의 보편적인 조건으로서 여성성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롱 추의 이러한 시도는 우리를 여자로 만들어버리는 욕망의 본질을 탐구하고 젠더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기존의 불완전한 젠더 이론을 완성시킨다. 정체성-주체적으로 자신을 어떻게 정체화하는지-은 중요하지 않다. 젠더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내 남자 친구가 이 드레스를 입길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내 남자 친구의 바람대로 이 드레스를 입고 싶어'(2019년 조르디 로젠버그와의 버소 대담)서라는 미묘한 구별. 바깥에서 나를 침투함으로써 생겨난 욕망이지만 나 자신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만은 아닌, 우리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 불편한 욕망을 받아들이고자 할 때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서로를 좀 더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