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드로잉 - 앤드류 루미스의 성공적인 그림 그리기
“ 기초로 돌아가라! ”
기초 연습은 특별한 생각이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그냥’ ‘계속’ ‘반복’해서 꾸준히 해야 녹슬지 않는다.
미술은 그야말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오늘날 그림을 그리려는 충동은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사로잡은 것 같다. 세계적인 현상이다. 많은 사람이 취미로써 관심을 두고 접근하지만, 본인이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면 기꺼이 생계수단으로 미술가의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림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과 그림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은 다르다. 대체로 지식이 재능으로 해석되지만, 그것은 아니다. 물론 구성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된 그림을 그려 내기 어렵다. 재능을 발휘할 수단이 개발되어야 재능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수단은 인간의 시각에 적용되는 자연의 법칙을 합리적으로 정확하게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림은 종이 위에 펼쳐지는 시각이다. 그것은 개인의 시각이며, 개인의 인식, 관심, 관찰, 성격, 철학 및 기타 여러 자질이 한데 섞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변할 수도 없지만, 좋은 그림을 위해 변해서도 안 되는 요소이다.
드로잉은 다른 창작 예술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모두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고 관람객이 미술가의 내면을 의식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거나 나를 봐주길 바란다. 또한, 특정한 성취에 대해 찬사를 받고 싶어 한다. 아마도 미술가는 관람자의 관심을 끌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메시지를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할 수도 있고,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다.
드로잉을 표현의 매체로 선택했다면, 드라마 또는 음악의 기본이 있는 것처럼 미술에도 기본 원칙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미술에 대한 기본 원리는 실용학문으로서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상업 미술은 비교적 새로운 분야이다. 그러나 이 분야의 선구자들이 상업 미술의 교수법에 관해 시간과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창의적인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항상 독특함이 있어야 한다. 이는 대중과 차별화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술가란 모름지기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모방하지 않고, 기본 원리를 습득해야 성공할 수 있다. 기술에 종사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진실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특별함이 아니라 기술 자체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미술도 과학이나 다른 분야처럼 지식을 습득하고 다시 풀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학생들을 지도할 때 본인 작품을 예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는 내 작품의 특정 스타일이나 기법을 참고하지 않고도 학생들이 각자 작품에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 앞에 두 개의 작품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하나는 흥미롭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
하나는 좋고 다른 하나는 별로다. 왜일까? 나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를 지적할 수 있다. 이상하게도 그 이유는 미술책이나 교실에서 찾을 수 없다. 그림에 대한 반응은 개인의 감정과 경험과 관련이 있으며, 내가 아는 한 예술 교육과는 완전히 별개이다. 그럼에도 미술가가 왜 그런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는 크게 성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미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왜 매력이 없는지 깨닫지 못한 채 평생을 갈 수 있다. 성공한 미술가들조차 자신의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를 모를 수 있다.
우리는 왜 어떤 그림이 매력적이고, 또 어떤 그림은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걸까? ‘지적 인식’이라는 용어가 이런 능력을 설명하는 데 적합할 것 같다. 우리는 유아기부터 성장하면서 크기나 비율, 색상 및 질감에서 모양을 구별하는 방법을 배운다. 모든 감각이 결합하여 지능적인 지각을 제공한다. 우리는 원근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공간감이나 깊이감
을 알 수 있다. 즉 경험을 통해 정상적인 것과 기형적인 것을 빠르게 인식한다.
우리가 해부학과 비율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말로는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얼굴을 즉시 인식할 수 있다. 비율에 대한 감각이 있으므로 난쟁이와 아이, 강아지와 작은 개를 구분한다. 부피와 윤곽에 대한 감각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백조와 거위를 구별하고 거위와 오리를 구별한다. 이런 특성은 미술가뿐 아니라 예술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도 잘 발달되어 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빛의 효과를 받아들인다. 인공 조명, 석양, 햇빛 아래서 형태가 어떠한지를 안다. 그러한 인식은 자연의 일부이다. 관람자는 비율의 변화, 왜곡, 형태, 색상 또는 질감의 변화를 보는 순간 바로 알아차린다. 아주 정교하게 모방해도 속일 수는 없다. 백화점 쇼윈도의 마네킹은 누가 보아도 마네킹이란 것을 안다. 우리는 이미 각인된 인상을 통해 밀랍과 피부를 구분할 수 있다.
미술가들도 이러한 ‘지적 인식’을 무시할 수 없다. 미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한다. 관람자가 자신의 삶에 반응하듯 화가의 작품에도 반응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지적 인식은 오직 사실만을 인정한다. 관람자는 그림을 볼 때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라도 상관없다. 미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주장, 알리바이, 방어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목이 쉬도록 설명해도 인간의 의식에 깊이 박힌 어떤 것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만약 그림에서 색조나 명암이 어색하다면 관람자는 그것을 바로 느끼게 되고, 미술가가 관람자를 설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심리적 반응은 한발 더 나아간다. 모든 작품에는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있다. 만약 관람자가 작가의 의도를 알아차린다면 미술가는 관람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연의 영향 속에서 살면서 경험한다. 보면서 느낀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더 큰 반응을 얻을 수 있다. 미술가는 자신 안의 감정을 작품에 투영한다. 미술가가 작품에 투영한 감정은 관람자가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영화나 소설, 연극 속 캐릭터에 공감하는 것이다. 이런 작품이 개인의 감정에 어필하면서 어떤 장면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되는 것이고, 같은 이유로 미술 작품에서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생기게 된다.
그림의 형태, 질감, 공간, 조명이 적절하게 표현된다면, 관람자의 감정에도 호소하게 될 것이다. 관람자의 ‘지적 인식’이 그림에 설득력을 느낀다면 미술가에게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