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기심의 권력으로 읽는 세계사 : 한중일 편 - 힘과 욕망이 만들어낸 동아시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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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역사를 또다시 되풀이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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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다룰 때 우리에게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역사는 단연 동아시아의 역사다. 일제강점기라는 뼈아픈 과거의 경험 때문에 한일 간 역사 갈등은 계속되고 있으며, 중국이 동북공정 작업을 벌이면서 한중 간 역사 문제 역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고대부터 중국은 조공책봉관계를 통해 한반도에 권력을 행사했고,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권력욕 때문에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또한 조선은 명나라와 청나라 틈에 끼어 입장을 정하지 못하다가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을 겪었고, 일본 천황과 군부가 권력을 잡은 근대에는 우리나라의 국권이 피탈되는 아픔이 있었다. 이 책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왜 한반도를 침략했고 한반도 국가들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파헤치며 권력자의 기록 뒤에 감춰져 있던 한중일 역사의 진실을 드러낸다.
광개토대왕이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친 이유
고대 중국은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고 일컬으며 동서남북의 오랑캐들을 각각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라고 칭했다. 한나라는 이 오랑캐들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조공책봉 전략을 썼다. 고대 동아시아의 조공책봉관계는 단순했다. 힘의 논리에 따라 약소국이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강대국에 머리를 숙여야만 했고, 머리를 숙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실례로 한나라조차 흉노에게 조공을 바친 적이 있다. 한반도의 국가들도 다양한 이유로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광개토대왕은 실리를 위해 후연에게 책봉을 받았다. 당시 고구려는 후연과 백제를 위아래로 상대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후연이 북위 때문에 당장 쳐들어올 것 같지는 않으니 후연과 책봉관계를 맺어두고 백제와의 전쟁에 집중하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광개토대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한강 이남까지 진출해 백제의 항복을 받아낸다. 또한 남연에게 조공을 바쳤는데 사람 10명, 말 한 필, 곰가죽 같은 예물과 사신을 보냈다. 이 대목에서 광개토대왕이 상당히 국제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로 분석되는데 적은 조공을 보내면서 남연을 통해 중국대륙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려 한 점 때문이었다.
조선의 사대주의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한반도 역사를 이야기할 때 명나라와 조선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국가다. 둘은 비슷한 시기에 각각 원나라와 고려를 대체하며 역사에 등장했다. 또한 두 국가 모두 유교를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런데 조선에는 차츰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가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조선이 명나라의 속국인지 아닌지 논쟁이 벌어질 정도로 조선의 정치와 외교 활동에는 사대주의가 깊이 배어 있었다. 처음부터 조선과 명나라가 사대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명나라 주원장의 압박과 간섭으로 인해 요동정벌 이야기가 나오며 전쟁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 요동정벌을 추진했던 정도전은 살해되고 요동정벌 이야기는 종적을 감추게 된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영락제가 즉위하는데, 영락제와 태종 이방원은 둘 다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영락제는 조카 건문제를 내쫓고 황제가 되었고 이방원은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동생 이방석을 죽이면서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락제가 즉위하자 이방원은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사신을 보낸다. 조선 덕분에 황제 즉위에 힘이 실린 영락제는 조선 사신이 돌아갈 때 엄청난 양의 하사품을 챙겨서 돌려낸다. 한편 태종 이방원도 명나라 황제가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면서 정당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영락제와 태종은 조공책봉관계를 공고히 하면서 서로 권력을 안정적으로 가져갔다. 이런 양국 관계 속에서 조선은 명나라를 점점 진심으로 섬겨야 할 국가로 바라보게 된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명나라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일본을 물리치면서 말로만 듣던 ‘중화의 질서’가 바로잡히는 현실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를 뒤흔든 전쟁,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한중일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 중 하나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지 살피기 위해 파견된 조선 통신사들은 귀국 후 서로 다른 의견을 낸다. 서인이었던 황윤길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 같다고 보고한 반면,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전쟁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두 사람의 의견이 나뉘게 된 게 ‘당파성’ 때문이라는 설이 많이 퍼져 있다. 그러나 조선 통신사에 같이 따라갔던 허성도 동인이었지만, 서인이었던 황윤길처럼 일본이 쳐들어올 것 같다고 보고했다. 또 당시 동인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김성일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조선이 전쟁 대비를 하지 않아 일본에게 호되게 당했다는 설도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조선은 을묘왜변(1555년)이 터졌을 때부터 일본이 조만간 다시 쳐들어올 것을 우려해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었다. 특히 무명에 가까웠던 이순신이 초고속으로 승진해 전라도 바다를 지키게 된 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1년 2개월 전의 일이었다. 『선조실록』 24년 11월 기록에 따르면, 조선 조정이 통신사의 보고를 받은 후 왜란을 대비하기 위해 영남 지역의 성을 보수하고 병사들을 선발했더니 백성들의 원성이 심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에서 승자는 없었다. 조선, 일본, 명나라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는 임진왜란 이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국토도 황폐해져서 한동안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다. 또 명나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났다는 의식을 공유하며 외교적으로 보다 명나라에 의존하게 된다. 명나라는 안 그래도 약해져가던 국력이 임진왜란 이후 급격히 떨어지면서 수많은 민란으로 고생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얼마 안 가 이자성과 여진족(청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21세기판 ‘천자’를 경계하라
동아시아의 권력자들은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할 만한 그럴듯한 명분을 끊임없이 제공해왔다.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천자, 즉 ‘하늘신의 아들’의 통치를 받는 위대한 민족으로 여겼고,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 믿었으며, 옆 나라 조선 사람들마저 그렇게 믿도록 만들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조차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듯하다. 정치 영역의 경우 극단적인 유권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거의 종교와 같이 추앙하며 그가 당선만 되면 대한민국의 모든 일이 해결될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자들은 하나같이 겉만 번지르르한 명분만 앞세울 뿐 뒤에서는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권력을 가진 자들도 21세기 유권자들의 마음을 홀릴 수 있는 새로운 ‘천자’를 앞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지 조심스레 바라볼 필요가 있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