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100분 고전 015] 남산에 구름 끼더니 북산에 비 내린다 1 - 굉지 선사의 송고 100칙

[100분 고전 015] 남산에 구름 끼더니 북산에 비 내린다 1 - 굉지 선사의 송고 100칙

저자
정각
출판사
이펍코리아
출판일
2011-11-07
등록일
2012-11-16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966KB
공급사
웅진OPMS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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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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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굉지(宏智) 선사 광록(廣錄)≫ 9권 가운데 제2권에 수록되어 있는 ≪송고(頌古) 100칙(則)≫을 번역한 것으로,
사주(泗州)의 보조선사(普照禪寺)에 주석했던 굉지 정각(正覺)의 송고 100칙을 시자 법윤(法潤) 및 신오(信悟)가 굉지 입적 40년 후인 1197년에 편찬한 것이다.
송고(頌古)는 고인의 일화에 해당하는 고칙(古則) 내지 본칙(本則)에 대하여 송고의 저자가 자신의 견해를 운문의 형태인 게송을 붙인 것을 말한다.
굉지의 ≪송고 100칙≫은 다시 원나라 초기에 만송(萬松) 행수(行秀)가 그 전체적인 대의에 해당하는 수시(垂示),
짤막한 주석에 해당하는 착어(著語), 고칙 내지 본칙의 일화에 얽힌 자세한 배경 설명에 해당하는 평창(評唱) 등을 붙여
≪만송노인 평창(評唱) 천동각화상(天童覺和尙) 종용암록(從容庵錄)≫ 6권으로 만들었다.
책 속 & 줄거리
- 언설을 통한 설법은 수준이 보통이거나 그 이하의 사람들을 위한 진리의 조작 행위이다. 여기에서 세존의 침묵은 그와 같은 수준의 사람들을 위한 교화 방식에 대한 부정이었다. 곧 세존의 침묵과 그에 대한 문수의 적절한 대응 방식은 상상 근기(根機)만을 위한 교화 행위였기 때문이다.
- 청원은 ‘불법의 대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고차원적인 형이상학이나 철학의 논쟁을 초월한 현실의 문제를 제기해 그 스님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 스님의 출신지 혹은 수행처는 늘 쌀농사를 짓고 쌀을 먹으며 쌀을 가까이 하는 농경 지역이었기 때문에 쌀은 생활 그 자체였다. 그래서 ‘쌀값이 얼마나 되는 줄 아느냐’는 질문을 통해 즉금의 현실을 자각하게 한 것이다.
-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노파의 답변이 아니다. 조주와 승의 행위도 아니다. 오대산으로 가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되어 있다. 곧 왜 오대산으로 가려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오대산으로 가는 것이 문제이다. 선에서는 특별히 성스럽다거나 속되다거나 하는 것을 드러내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는다. 만약 성스러움을 좋아한다면 그 성스러움이란 것은 단지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오대산에 가서 문수를 찾고자 한다. 그것은 벌써 그르친 것이다.
- 운문이 화장실에 가서 한참 일을 보고 있을 때 학인이 불법의 근본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러자 운문은 일을 보고 있는 그대로 마른 똥 막대기를 들어 그것이 그대가 묻는 불법이라고 들이댔다. 운문은 그 누가 와서 불법의 근본에 대해 물으면 있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제시해 주었다. 일을 다 보고 나서 화장실을 떠나 설명해 준다든가 또한 일을 보고 있다는 것을 핑계 삼아 답변을 회피한다든가 하는 것은 벌써 불법이라든가 화장실이라든가 하는 것에 분별심이 있는 것으로 그것에 집착하는 꼴이 되고 만다.
- 정법안장이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어떤 모습으로든지 항상 열려 있고, 나타나 있으며,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도리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어중이떠중이 내지 나귀와 같은 존재에게도 정법안장은 드러나 있고, 작용하고 있다. 바로 그 도리를 누구나 다 알고 있어야 한다.
- 깨침이란 누가 인정한다고 해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스스로가 그것을 깊이 체험하고 나면 그 누가 자기에 대해서 설사 연지 찍고 곤지 찍는다 해도 더 이상 문제 될 것이 없다. 깨침이란 그 흔적을 말끔히 쓸어버리고 은근히 아무도 몰래 어수룩한 모습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깨치고 못 깨치는 것은 대상의 차이가 아니다. 털끝만치의 차이가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분별심을 여의는 것일 뿐이다. 조금의 사심도 없이 드러나 있는 그대로의 관찰이 필요하다. 백퍼센트 그대로 자신을 통째로 들이부어 온전하게 수용하고 부정하는 힘이 없어서는 안 된다.
-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유(有)의 상견(常見)에 빠져 있는 제자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무(無)의 부정적인 말을 통해서 그 상견을 끊어준다. 그리고 다시 어째서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 하는 무의 단견(斷見)에 빠져 있는 제자에게는 불성이 있다는 유의 긍정적인 말을 통해서 그 단견을 끊어주는 것이다.
- 현실을 살아가면서 누구든지 망념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망념을 망념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망념인 줄 알면 더 이상 그것에 지배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요컨대 망념을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망념을 망념인 줄 알고서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망념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망념에 상대하는 자체가 곧 분별심이다.
- 법안은 이리저리 행각을 나서기로 했다. 굳이 어디라고 정해 둔 목적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어디로 가려는지 정작 자신도 모른다. 여기서 그 목적지를 안다는 것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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