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먼 아프리카의 이쯔리 섬으로 가고 싶다
긍정의 형식이든 부정의 형식이든 삶에 대해 무언가 발언할 수 있다면 그는 대체로 치열한 삶의 자세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삶에 대해 아무것도 발언할 수 없다면 그의 삶은 대체로 공허하거나 장식적인 것으로 간주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현실과 부대끼는 존재일 것이다. 왜냐 하면 예술이란 어쩔 수 없이 삶을 향한 발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실과 무관한 것처럼 여겨지는 음악이나 비구상 회화, 무용 등의 비묘사적 장르들 역시 추상적 형상 언어를 통해서 삶에 대해 적극적으로 진술한다. 심지어 건축 같은 장르조차도 독자적 언어로 인간과 현실을 진술한다.
그러나 다른 어떤 장르 예술가보다도 문학가들, 특히 시인들은 더욱 치열한 정신의 소유자들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한 정서적 환기, 대상과의 주관적 교감을 본질로 하는 시는 장르적 속성상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며 간접적인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에서는 전적으로 주관적이며 직접적인 진술만이 가능하게 되며, 이 때문에 시인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삶과 직접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다. 이 부딪침은 언제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삶과 언어의 부딪침은 필연적으로 존재의 파열을 동반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존재의 파열은 삶과 언어 사이의 간극을 불러오게 되며, 이 간극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균열이 시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된다. 이 힘의 자각은 시인으로 하여금 이제 삶과 세계의 일치가 더 이상 가능하게 않게 된 상황과 맞닥뜨리게 만든다. 세계와 삶의 행복한 일치를 구가할 수 있었던 고전 시대는 아스라한 이상의 세계로 물러났으며, 이를 대체한 자본주의적 질서의 구축은 파편화되고 왜곡된 삶을 현실과 항상적인 긴장 관계에 놓이게 만든다. 이 긴장의 양상이 바로 존재의 파열 형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전원적인 목가나 낭만적인 연가가 근원적으로 불가능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적인 연가를 꿈꾼다면 그것은 허황한 자기기만에 불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