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가위
구경하지 못한 뷔페 식당에서 누리는 색다른 즐거움과 맛
소설가 이원규가 해설의 첫머리에서 말하듯 ‘김숙의 소설을 읽는 일은 지루함 없는 즐거움의 연속’이다. 아름다운 문체가 우리의 감각을 즐겁게 한다.
문단의 늦깎이 작가로, 혹은 얼굴 없는 작가로 알려져 있던 소설가 김숙, 그녀가 첫 단편집을 펴냈다. ‘그 여자의 가위(여성신문사)’
“신영은 다시 가위집을 열었다. 이번엔 아주 날렵한 4, 5인치짜리 마츠자키 가위를 꺼낸다. 고단한 비행을 끝낸 작은 새처럼 웅크리고 있던 그 여자의 가위가 천천히 매끄러운 은빛 날개를 펼친다.”
-그 여자의 가위 중에서-
김숙의 첫 단편집은 연륜만큼 세월의 두께를 느낄 수 있는 체험의 깊이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또한 독자들이 작가의 물리적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여기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소설들은 젊고 신선하다. 그래서 평론가 김수이는 ‘그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즐거움이며 일종의 혜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즐거움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을 잘 살펴보면 실을 뽑듯 명료하고 단순하게 쓰여진 작품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의 글이 고통스럽다거나 난해하게 읽혀질 구석도 없다. 김숙의 글이 시사하는 바는 바로 이러한 딜레마를 세상과의 약속이나 정을 나누기 위한 장으로 승화시켜 놓았기 때문에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의 손길은 당연히 가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9개의 단편은 뷔페식당과도 같다. 하지만 유명한 호텔의 정갈스런 음식도 아니고, 우리가 잘 아는 한식뷔페의 고유한 맛도 아니다. 그녀가 차려놓은 뷔페에는 감칠맛 나는 겨자소스를 가미한 지중해 어느 해안의 생선에서부터 문경새재 깊은 산중의 이백년 산삼에서 나올 만한 엑기스와도 같은 향취가 골고루 어깨를 겨누고 있다. 그의 작품집에는 그렇게 색다른 즐거움과 맛이 배어 있다.
김숙의 소설은 삶의 근원적 슬픔의 은유이다
현대인의 상실감과 삶의 밑바닥에 고인 근원적 슬픔을 다양한 화소와 반짝이는 은유를 통해 담아낸 이번 작품은 깊고 은은한 우물물처럼 독자의 가슴을 적셔 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이 작품집은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모티브를 담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 여자의 가위’의 화자는 20대 후반의 미용사로 미용실에 들르는 고객들의 고독을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하여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소설의 구조 밑바닥에 깔린 삶의 근원적 슬픔에 대한 의미는 ‘그 여자의 가위’속 단편인 <스무살의 MOTEL>에서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여자의 가위’에서 초등학교 6학년으로 등장하여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조숙하고 고독한 캐릭터인 나리라는 소녀가 <스무 살의 MOTEL>에서는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스무 살 성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삶의 주변부를 떠도는 친구들과 해체된 가족 그리고 주변인물들 속에서 성인의 문턱을 넘으며 온몸으로 인생의 통과의례를 겪는다.
음악을 좋아하는 택시기사의 고독을 풍선인형과 고양이, 떠돌이 소년 그리고 떠난 애인과의 관계 속에서 마치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듯한 <원더풀 투나잇>은 음악적 상상력을 확장하여 써내려 간 수작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오래된 타자기를 가운데 두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애증의 고리를 풀어가는 야간 고등학교 2학년생의 고독을 깊은 인간애로 승화시킨 <클로버 타자기>에서는 10대 소녀의 심정을 자기 것으로 동일시하는 사십대 작가의 변신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즐거운 독서의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외 절대고독과 위안을 주제로 삼아 뜨거운 작가정신으로 엮어낸 <새벽에서 새벽까지>와 가족의 붕괴와 봉합, 또다시 해체되는 과정을 상가 주변 인물들을 통해 그려낸 <수선(修繕)>. 그리고 마흔 살 먹은 ‘나’가 파출부이자 간병인으로 돌보았던 70대 노인인 ‘당신’에게 고백하는 형식으로 쓰인 1인칭 소설 <오래된 붉은 벽돌집>에서 작가는 각각 다른 모티브와 캐릭터를 가지고 분방한 상상력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미국인 남성 동성애자를 바라보며 한국 사찰의 ‘꽃문’만 찍은 사진집을 배경으로 깔아 이상향과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이중장치로 사용하고 있는 <게이 조지 혹은 꽃문> 그리고,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겪는 남창 준(June)에 대한 사랑과 고흐의 연인인 창녀 시엔을 그린 목판화를 압축한 <슬픔(Sorrow)>에서는 고정관념과 합리적 인식의 틀을 바꾸는 태도를 볼 수 있다.
형용할 수 없는 좋은 예감으로 다가서다
평론가 김수이는 이 소설집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소설은 ‘가족해체, 성 문제, 사회적 고립, 일상과 생계 등의 다양한 문양을 지닌 배색효과가 뛰어난 패치워크’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 한 권의 패치워크를 하나의 물줄기처럼 관통하는 ‘슬픔’은 독자에게 강요된 눈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김윤식 교수의 말처럼 작가는 독자에게 ‘많은 얼치기 신인들처럼 윽박지르지 않음’으로 이 소설집을 읽는 동안 독자는 편안하게 자신과 마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늦깎이 작가 김숙의 소설과 만나는 일을 김수이는 ‘일종의 혜택’이라 말하는 것이다.
단편집 한 권에 실린 ‘혜택’. 그것이 바로 구경하지 못한 뷔페식당에서 누리는 맛과 즐거움이 아닐까?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는 이렇게 신선한 작가를 접하면서 오랜기간 작가가 준비해 둔 요리들을 즐겁게 맛보며 감상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이 책을 접하는 독자에게 문단의 시류로 보더라도 형용할 수 없는 ‘좋은 예감’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