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산문답·계방일기 - 인간과 만물 간의 경계를 넘어 우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 클래식 아고라 3
이 땅을 넘어 중국 너머의 세계와 지구의 모습을 제대로 본, 『의산문답』
영명한 군주가 될 정조를 통해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한, 『계방일기』
홍대용은 『의산문답』을 통해 허례허식에 찌든 고답적인 사고방식을 혁파하고자 애썼다. 이 책은 청나라 의무려산에서 가공의 인물을 만나 대화를 나눈 형식의 글이다. 의무려산은 불교와 도교의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는 불교의 명산이자, 요동과 중원을 나누는 기점으로 이른바 중화와 오랑캐의 경계가 되는 산이다. 홍대용은 청나라에서 귀국하던 길에 이 산에 올랐다.
과학사상서이자 철학소설인 『의산문답』에는 실학자를 상징하는 ‘실옹’과 공리명분에만 치우친 ‘허자’라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의산문답』은 ‘허자’라는 인물이 의무려산을 오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기존의 경직된 유교적 가치와 명나라 중심의 중화주의 질서를 비판했다. 이 바탕 위에서 홍대용은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완성했다.
또 하나의 책인 『계방일기』는 정조의 세자 시절 학습을 담당했던 경험을 담은 책인데, 이 책에서는 홍대용의 개인적인 인품이 많이 드러나 있다. 홍대용과 함께 세자의 학습을 돕는 여러 문신들이 등장하고, 가끔은 세자가 그들을 품평하는 모습도 그려진다. 이 책에서도 홍대용은 자신의 실학적 사상을 세자에게 설파하는 모습이 보인다.
조선 후기의 뛰어난 학자이자 북학파의 선구자.
어린 시절 석실서원의 유학자 김원행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수학, 천문학 등 과학 분야에 학식을 쌓았다. 성장하면서 북학파 실학자인 박지원, 박제가 등과 친하게 지내며 실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65년에는 서장관이 된 숙부 홍억의 추천으로 자제관이 되어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때 북경에서 청나라의 학자인 엄성, 반정균, 육비 등과 사귀면서 학문에 대해 토론했다. 귀국 후에도 이들과 편지를 통해 계속 교류하면서 청나라 학문을 받아들였다.
북경 방문은 그의 학문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북경에서 보고 들은 것이 북학사상의 근원이 되었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음직으로 관직에 나갔다. 1774년 세손익위사시직이 되었고, 이듬해 선공감 감역을 거쳐, 사헌부 감찰, 태인현감, 영천군수가 되었다.
북학파의 선구자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청을 비롯한 서양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지구의 자전설, 균전제•부병제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 개혁, 과거제도 폐지, 공거제에 의한 인재 등용, 신분 차별의 철폐, 교육기회의 균등 등 혁신적인 개혁사상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담헌서>, 편서에<건정필담>,<담헌연기>,<임하경륜>,<사서문의>,<항전척독>,<삼경문변> 등이 있다.
서문-1766, 스페이스 오디세이
의산문답
계방일기
해설
홍대용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