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인터뷰
언론플레이와 여론 조작의 달인 나폴레옹?
카이사르에게 클레오파트라는 단지 첩이었나?
진시황이 중국사 최고의 황제였다?
카사노바가 1천 여 명의 여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특급비책은?
조조는 관용과 용인술의 대가였다?
장보고가 대형 로비스트?
이토 히로부미가 온건파였다고?
30만 독자가 선택한 『하룻밤의 읽는 한국사』 저자 최용범의
세계사 인물 탐험!
30만 독자가 선택한 『하룻밤의 읽는 한국사』 저자 최용범이 쓴 『역사인물 인터뷰: 세계사인물 다시 보기, 진시황에서 이토 히로부미까지』. 책은 독재자, 역적, 요부 등 극단적 평가를 받고 있는 13명의 세계사인물들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명하고 그들의 감추어졌던 진실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그들에게 또 다른 진실이 있지 않을까,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어떤 것이었나, 그들은 일생을 통해 무엇을 찾고자 했는가, 또 어떤 것을 가장 소중히 여겼는지를 좌도 우도 아닌 한가운데의 시선으로 상상하고 읽어낸다. 그리고 그들의 치열한 삶에서 추출된 이야기들을 인터뷰라는 형식을 빌려 접근한다. 인터뷰는 인물을 둘러싼 특정 사건이나 상황의 생생한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주는 매우 실용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평면적으로만 인식되던 13명의 역사인물들은 피가 돌고 살이 붙어 목소리와 표정을 가진 입체적인 인물들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뒤집어 보고 꺾어 읽는 역사,
오해와 편견의 역사인물 다시 읽기!
시공간이라는 거대한 매트릭스 안에 무수한 사건들이 기록된 역사의 강에는 언제나 차이와 반복의 물살이 때로는 거칠게 또 때로는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거대한 지각변동으로 인해 물줄기가 크게 바뀌기도 하지만 그 안의 미세한 진동들을 제대로 탐사한다면 인간과 삶, 시대를 폭넓게 통찰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우리 시대의 방향 설정에 주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바라보는 시점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모든 역사는 다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역사 인식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절대적 사고 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도 쉽게 학습화되어있다. 특히 역사인물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이를 테면 ‘불로초, 아방궁, 만리장성, 분서갱유’로 인식되는 진시황은 잔혹한 폭군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진시황은 “난세의 위대한 리더이자 역사의 건설자”로 재평가되며 중국사 최고의 황제로 꼽힌다. “중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역사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중국 내 설문조사에서 거의 언제나 진시황과 마오쩌둥 두 사람이 1, 2위를 다툰다고 한다. 특히 마오쩌둥은 진시황을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4명의 황제 중 한 사람으로까지 꼽았다.
절대적 사고 패턴에서는 오직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의 ‘이더 오어(either-or)’만 있을 뿐 제3지대, 제3의 시선은 인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권력싸움에서 밀려났다면 분명 패자에게 큰 결함과 과오가 있을 것이다’라는 식의 사고만 가능하다. 참과 거짓 어느 한쪽만 보도록, 어느 한쪽만 믿도록 사고가 디자인되는(혹은 조정당하는) 것이다.
‘이더 오어(either-or)’의 역사에 물음표를 던지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 역사는 승자 중심의 논리가 너무 강했다. 이는 단지 기록의 문제만은 아니다. 승자의 기록인 정사에만 지나치게 의존했다. 패자 입장에서의 기록은 물론이고, 그 해석도 적었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고, 패자는 나름의 정당성조차 잃고 부관참시당한다.”
그렇다. 역사의 표면에는 언제나 승자와 패자의 명백한 대비가 있다. 그러나 심층 구조의 측면에서 보면 패자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 온갖 약점을 권력으로 감추고 있는 승자의 자기중심적 시선이 드러난다. 물론 승자와 패자 사이에 팽팽한 대립각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서 역사는 필요한대로 만들어 진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기실 ‘서로’를 배제하고 ‘우리’만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승자에 의한, 승자를 위한, 승자의 권력사인 셈이다. 즉 역사는 패자를 불공평하게 다루고 승자가 힘주어 말하는 역설이요 힘의 기록인 역사다.
“정치권력을 둘러싼 싸움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운칠기삼이란 말이 있듯, 정치사에서는 단지 실력만이 아니라 운이 더 큰 몫을 차지하곤 한다. 운명의 여신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운을 가졌던 승자만을 지나치게 챙겨주는 것은 기 3은 다했건만 운이 따르지 못해 좌절하고 만 역사 속 인물들의 피땀 어린 흔적을 간과하게 마련이다.”(본문 131~132쪽)
『역사인물 인터뷰: 세계사인물 다시 보기, 진시황에서 이토 히로부미까지』는 다양한 각도에서 본 역사인물 이야기다. 역사의 표면을 넘어서 역사? 만들고 간 사람들의 심층 구조를 접근한다. 무엇보다도 가상인터뷰라는 실용적 도구를 사용해 역사인물을 둘러싼 역사적 사료의 진위를 가리고, 역사인물에 대한 그릇된 오해를 해명하며 감추어졌던 진실을 새롭게 밝혀낸다. 인터뷰는 인물을 둘러싼 특정 사건이나 상황의 생생한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주는 매우 실용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역사적 실패가 주는 교훈은?
책에서 저자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13인의 역사인물들(진시황, 클레오파트라, 조조, 측천무후, 장보고, 궁예, 정도전, 허균, 광해군, 카사노바, 나폴레옹, 명성황후, 이토 히로부미)을 통해 역사의 불공평함이 무엇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이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이었는지 물음표를 던진다. 그 과정에서 당연하게 여겨져 온 역사 상식 중 분칠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지적한다.
가령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를 맞아 한순간에 권좌에서 축출된 광해군. 그는 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모시킨 패덕의 왕, 지나친 토목공사로 민심을 잃은 무능한 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광해군은 사대주의에 몰입된 신료들의 거듭된 반대에도 초강대국 명나라를 ‘주무르고’, 신흥 강국 후금(청)을 ‘달래는’ 탁월한 외교정책을 구사한 중립외교의 달인이었다. 임진왜란이 남긴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대동법 추진으로 민생안정에 주력했던 왕이었으며 또한 선조의 명이긴 했지만 광해군의 지원으로 동아시아 최고의 의학서인『동의보감』이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런 치적들은 내치에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결과 쿠데타를 맞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저자는 광해군의 역사적 실패가 오늘날 우리하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현대적인 시각으로 분석한다. 광해군의 탁월한 외교정책은 왜 좌절됐고, 당시 그가 부닥쳤던 문제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으며, 또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현미경적 시각으로 들여다본다. 아울러 저자는 광해군의 실패가 주는 역사적 교훈을 통해 특히 대북 정책과 관련해 지금 우리 시대 즉 “4대 강국의 틈바구니 속 한반도적 시야에서의 탁월한 외교력”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언론플레이와 여론 조작의 달인 나폴레옹?
정복자의 대명사이자 전장의 최고지략가로 알려진 나폴레옹이 사실은 언론통제와 여론조작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경력도 없는 코르시카 출신 대위가 일약 프랑스 군대의 총아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1793년 툴롱 전투를 앞두고 자비로 출판한 『보케르에서의 저녁식사』란 책 때문이었다. 군대 대표위원들에게 자신의 책을 보낸 나폴레옹은 이들의 눈에 띄어 포병장교로 툴롱 전투에 참가해 큰 공을 세웠고, 일약 육군 준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언론을 여론 통제의 수단으로 삼아 그를 적극 활용했다. 최고권력을 잡은 후 적대언론을 검열하고 폐간했으며 군대소식지를 만들어 정보조작을 일삼았다. ‘전황보고 같은 거짓말’이라는 비유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잘못된 언론관은 정부와 군, 저널리즘의 관계에 대해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가지 시사점을 남긴다.
“막스 갈로는 나폴레옹을 현대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의 창안자였다고 평가한다. 나폴레옹은 여론을 정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아주 일찍부터 이해했다. 프랑스혁명을 결국 여론의 승리로 봤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여론이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적대적인 신문을 검열하고, 폐간했다. 그는 이탈리아 전장에서도 《이탈리아군 통신》《프랑스 파트리오트》《이탈리아에서 본 프랑스》《보나파르트와 덕망 높은 사람들의 신문》 같은 신문의 창간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군내에서도 소식지를 만들기도 했다. 일종의 여론조작을 했던 것이다.”(본문 251~252쪽)
르네상스적인 인문주의자, 조조!
권모술수와 잔혹함의 대명사로 악명 높은 조조지만 입체적으로 바라본 그는 숱한 전장을 빠지지 않고 누볐던 용장이며, 관용에 바탕을 둔 용인술의 대가였다. 조조의 압도적 능력은 시대상황에 적합한 유연한 임용 기준을 세웠다는 것이다. 어지러운 혼란기에는 인품 보다는 전장에서의 공로와 능력이 중요하기에 장수로서 맡은 임무를 다할 수 있는 사람,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를 움직이는 전략과 전술에 뛰어난 자가 있으면 출신에 상관없이 언제든 기용했다. 그에 비해 덕장의 화신이라는 유비는 동맹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 끊임없이 반목했다. 조조를 비롯해 공손찬·도겸·원소·유표·손권·여포 등과 유비가 먼저 의탁해 동맹관계를 맺었지만 나중에는 이들과 모두 대립한다.
또한 조조가 『삼국지』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중 교양이 가장 풍부한 인물이었다는 점도 재미있다. 서예, 장기, 음악, 건축술, 기계제작에까지 다양한 범위의 지식을 섭렵했던 조조. “당시 그를 필적할 수 있는 사람은 제갈공명 정도에 불과했으니, 그만큼 조조는 인문, 자연, 기계공학 등 풍부한 교양을 자랑하는 르네상스적인 인문주의자”(본문 65쪽)였다.
이밖에도 미모로 이집트와 로마의 최고권력자들을 홀리고 색정에 가득 찬 여자로 기록된 클레오파트라가 사실은 이집트의 독립과 번영의 꿈을 놓치지 않았던, 교양과 재능이 넘치는 여왕이었다는 것. 46년간 대제국을 호령한 중국사 유일의 여황제 무측천 역시 권력을 잡기 위해 자신의 자식을 죽인 악독한 여제 혹은 수십 명의 남자 첩을 거느린 색정의 노인네로 알려졌지만 그녀가 황제로 있을 당시는 민중에게는 최고의 평화로운 시대였고, 중국의 대외 관계가 편안하기 그지없었다는 것. 무자비한 애꾸눈의 폭군으로 알려진 궁예가 사실은 맨몸으로 후고구려를 세우고 한반도 3분의 2 영토를 지배했던 탁월한 장수이자 미륵사상이란 민중해방 사상의 꿈을 갖고 있었다는 것. 청해진의 장수 정도로 알려진 신라의 장보고는 도자기 제조업과 무역업으로 동아시아를 휘저은 해상제국의 CEO였으며 우리 역사상 최초로 역성혁명을 기획해 성공시킨 조선 왕조의 기획자이자 설계자였던 정도전이 5백년 조선 역사에서 반역자로 남게 된 이유,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허난설헌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는 허균이 조선사 최다 복직과 파직을 거듭한 이단아이자 조선왕조의 기피인물 제1호였다는 것. 희대의 바람둥이라는 카사노바는 7개국어에 능통하고 온갖 재능을 갖춘 팔방미인형의 쿨가이였다는 것. 구국의 여걸로 알려진 명성황후의 이면에는 민씨 척족을 위해서만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했다는 것. 한일병탄을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가 사실은 일본 정계에서는 온건파였다는 것 등. 저자는 제3지대의 시선에서 견인된 역사인물 및 그들을 둘러싼 갖가지 정황적 면면들이 평면적인 역사 상식에 공간과 양감, 입체감을 불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