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황 평전 - 시를 사랑하고 늘 봄볕 같았던 한 청년의 기록
김두황 열사 40주기 부치는 ‘기억의 헌사’
너무나도 빛나고 매력적인 청년에 대한 짙은 그리움과 그 기록
못다 한 일들과 얘기들을 남기고 너무 일찍 떠난 청년이지만, 김두황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1980년대 군사독재와 맞서며 피를 흘렸던 많은 청년들이 대부분 갓 피어오른 청춘의 짧은 얘기만을 남긴 것에 비해 김두황은 고대 학생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덕에 학내외를 종행했던 많은 일화들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물론 저자의 섬세한 채집과 발품을 아끼지 않았던 장시간의 노력이 만들어낸 소중한 기록이다.
이 책 『김두황 평전』은 저자 스스로도 얘기하듯 김두황 열사 40주기에 부치는 ‘기억의 헌사’라 할 수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친구, 선후배 마음 깊숙한 곳에 아련하게 남아 있는 혹은 가슴 한가운데에 오랜 세월 동안 새겨져 있던 기억의 조각들을 모았던 까닭이다. 그 기억의 파편들을 바늘에 실을 꿰듯 가지런히 정돈하고 재구성한 결과,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너스레를 뜨는 김두황의 생생한 모습과 온몸을 던져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던 그때 그 자리 그 사람들의 숨소리가 어우러진 영상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 전반에 녹아 있는 정서는 비장함이나 엄숙함보다는 짙은 그리움에 가까워 보인다. 충격적인 죽음 앞에 살아남은 자들의 북받치는 슬픔이 곳곳에 배어 있지만, 이 책 부제가 말하듯 늘 봄볕같이 따스하고 유쾌했던 김두황의 캐릭터가 사람들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는 것과 관련 있어 보인다. 그런 이유인지,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옛 기억에는 뜨거운 인간애 사이를 파고드는 김두황 특유의 위트와 해학이 겹쳐진다.
다정다감하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청년
가장 인기가 많고 화려한 언변을 자랑했던 청년
같이 있으면 언제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하는 사람!
이 책은 김두황의 어린 시절부터 연대기적으로 23살 청년의 짧은 생을 다큐 형식의 내러티브를 통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면을 대학 입학 후 학생운동에 매진하며 동분서주했던 시기에 할애하고 있다. 또 김두황이 걸었던 그 길에 함께했던 사람들의 고뇌와 웃음을 덧붙였다.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다. 이 책에는 1980년 서울의 봄 시기부터 1980년대 초중반의 고대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내밀한 서사가 부록처럼 달려 있어 격동의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 싸운 학생운동 주역들의 치열했던 분투기를 엿볼 수 있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전하는 김두황의 면모와 활약상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그들이 전하는 김두황은 신입생 새내기부터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거침없이 말하고 형형한 눈빛으로 세상을 응시하며 뜨거움을 발산하는 학우였다. 사석에서는 쉴 새 없이 농담을 늘어놓으며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장난꾸러기였고 화려한 언변과 제스처로 선후배 간의 엄숙한 위계를 한순간에 허물어버리는 악동(?)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먼저 배려하고 포용하며 상대를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친구이고 선배였다. 밤늦은 시간까지 술잔을 기울이고 줄담배를 피워도 모든 일을 철저하게 준비하는 성실한 학생운동가였으며 힘겨운 자취생활 과정에서도 시를 낭독하면서 요리와 설거지를 척척 해내는 낙천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는 “엄마, 엄마!” 하면서 애교를 부리는 장난꾸러기 막내아들이었고, 결국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천하의 불효자였다.
김두황은 특히 시와 노래를 사랑하는 낭만적 로맨티스트 기질이 다분했다. 그는 김수영, 김지하, 신경림 등의 시집을 항상 품고 다니며 동료나 선후배들에게 들려주었고 때때로 동기와 시를 낭송했다. 질식할 것 같은 시대의 목마름과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비원의 열망을 시를 통해 토해냈을 만큼 감수성과 혁명적 낭만성이 넘쳐났다. 그렇다고 어설픈 감성에 자신을 가두거나 격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학생운동 리더가 되면서 짊어졌던 무거운 책무를 소홀히 할 수 없어서였을까?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에 좌절하지 않았고 반드시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게다가 모진 운명 앞에서도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았으며 이별의 순간까지도 친구를 위로하며 그리워했다. 하지만 자신의 최후가 가슴 시린 비극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는 군의문사 진상규명 투쟁
허공에라도 끝까지 소리쳐야 하는 이유?
김두황의 군의문사 이후 22사단 헌병대는 사고 현장의 증거를 모두 없애고 유가족을 압박해 화급하게 화장 처리를 한 뒤 비관자살이라고 발표했다. 자살 증거를 조작하고 터무니없는 허위정보를 유포해 스러진 영혼을 다시 짓밟는 추악한 범죄행위를 태연하게 자행했다. 그가 떠난 후 오열하던 아버지는 1년 후 세상을 떠났고 또 1년 후에는 막내아들을 그리워하며 아들의 얼굴을 그리던 어머니가 그 뒤를 이었다. 경찰의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해 김두황 이름을 불었다는 이유로 그의 선배와 친구는 평생을 자책하는 천형을 짊어져야 했다.
민주주의 제단에 피를 흘린 김두황의 헌신은 극단적 비극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진실을 얘기할 수 없는 군사독재의 시대를 견딘 후 김두황의 군의문사는 다시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졌다. 유가족이 앞장서고 민주단체가 가세한 힘겨운 진상규명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9년 12월 마침내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이 통과되어 군의문사 진실을 합법적으로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듬해에 의문사위 1기가 발족되어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되었고 이후 위문사위 2기, 국방부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 진실화해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 1, 2기 등 무려 다섯 개의 위원회가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두황 군의문사에 분노한 고대생들의 추모행렬도 이어졌다. 1984년 4월 17일 김두황 추모식에 수천 명이 학생들이 살인정권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이후 1985년, 1986년을 거쳐 1987월 6월 민주항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고대 학생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김두황 열사를 기리고 군의문사 규명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단체도 결성되었다. 2000년에 발족한 김두황추모사업회는 김두황의 오랜 벗들인 고대 80학번 동기들이 주축이 되어 지금까지 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 단체를 이끌고 있는 인물은 대학 1학년 때부터 줄곧 함께했던 평생동지 양창욱 회장이다. 양창욱은 김두황과 같이 연행되어 고문을 받은 뒤 22사단에 강제징집된 인물이다. 그는 강제징집 직후 훈련소에서 자신의 강제징집을 비통해하는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절망했으며 자대배치 후에는 친구 김두황의 비보를 접하고 또 한 번 무너져내렸다. 설상가상으로 보안사의 프락치 공작을 강요받으면서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야 했다. 몇 년 전에는 뇌경색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천운으로 살아나 힘겨운 재활을 거쳐야 했다. 여러 번 생사를 넘나들었던 양창욱은 아직도 뇌세포 활동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 몸에도 불구하고 40년 전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친구를 위한, 옛 동지를 위한 투쟁의 자신의 소임이고 운명이라 여기며 매주 수요일이면 진화위 사무실 앞에서 ‘진화위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집회’에 나서며 쉼 없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몸도 성치 않은데 왜 이렇게 진상규명에 앞장서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질문에 그는 말한다.
“세상에 잊지 않도록, 언제든 다시 조사될 수 있도록 우리가 허공에라도 계속 소리쳐야죠.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질 것입니다.”
김두황은 1980년 고려대 입학과 함께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그가 3학년이 된 1982년부터 고대 학생운동 전반을 이끌었던 핵심 운동가였다. 1983년 소위 3.7 사건에 연루된 그는 경찰에 연행된 후 조사 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서 곧바로 강제징집되었다. 그리고 강제징집 90일 정도 지난 시점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추천사]
이 책은 학생운동가들의 삶을 기록한 소중한 자료임과 동시에 의문사로 남아 있는 국가폭력의 잔인성을 고발하고 폭로하는 이야기이다. 모두가 힘을 모아 김두황 군의문사 진실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살아 있는 우리들의 책무이다.
- 정세균(노무현재단 이사장, 전 국무총리)
결코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졌던 나의 친구 두황을 다시 떠올려 본다. 그 많은 시간 동안 되뇌이면서 못다 한 얘기와 쏟아낸 눈물 대신 그리운 친구에게 노래 한 곡을 바친다. - 양창욱(김두황추모사업회 회장)
광주의 장엄한 비극으로 시작된 1980년대, 당시의 청춘들은 광주의 죽음을 외면할 수 없었고 더 이상 죽음은 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실제로 많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1980년대를 지나온 우리는 모두 가슴 저미는 아픔으로 김두황을 기억합니다. 이 책은 그때의 동지들 가슴에 사무친 기억들을 모아 혁명을 꿈꾸던 1980년대 청년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했습니다. - 안병욱(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
이 글은 칠흑 같은 시대에 학생운동의 한복판으로 들어갔던 김두황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지금 다시 시작되고 있는 어두운 시대의 한복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 오동진(영화평론가)
1984년 4월 17일 김두황 추모제에서 첫 데모를 했다. 만난 적도 없지만 잊을 수 없는 이름과 함께 나의 학생운동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잠든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 부근에서 나는 여전히 통일걷기를 하고 있다.
- 이인영(국회의원, 전 통일부 장관)
경제학과 후배인 내게 김두황 형은 시대의 엄혹함과 함께 학생운동을 하려면 어느 정도까지 각오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늦게나마 흑백사진과 이야기로만 접했던 형을 책으로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갑다.
- 박시백(『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