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 쾌락 : 현대지성 클래식 47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각자도생, 인생의 혹한기를 만난 우리 앞에
선물처럼 다가온 가장 현실적인 철학
나라마다 ‘중산층’을 정의하는 기준이 다르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는 중산층을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도우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 사람. 그리고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있는 계층”이라고 가르친다. 프랑스는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이 제시했던 ‘삶의 질’ 공약에서,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으며,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고, 남들과는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사회적 공분에 의연히 참여하고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을 그 기준으로 내걸었다.
우리는 어떤가? 직장인 대상 한 설문조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답변이 나왔다. “부채 없이 30평 이상의 아파트 소유,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2000cc급 이상의 중형차 소유, 통장 예금 잔고 1억 원 이상, 1년에 1회 이상 해외여행.” 물론 공식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슬프게도 우리에게는 상당히 익숙한 얘기다.
핵심은 저기는 정신적인 가치를, 우리는 숫자를 내세운다는 것이 아니다. ‘성공’이나 ‘행복’이라고 했을 때 그 기준이 자기 안에 있지 않고 모두 내 밖에 있다는 사실이 문제다. 내가 얻어내도 행복하지 않을 기준을 억지로 내면화하려다 보니, 자신과 맞지 않는 옷을 오랫동안 입고 있는 모습이다.
에피쿠로스가 활동하던 시대도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처럼 그리스 도시국가 내외로 큰 변화가 있던 혼란기였다. 제1~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해 아테네의 국력이 쇠퇴하고, 알렉산드로스가 이끌던 마케도니아가 전 세계를 휩쓸던 때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융성하던 안정과 평화의 시대는 지나고, 헬레니즘이 문화 코드로 자리하던 시대에 개인은 각자도생과 자존을 배워야 했다. 사회적 혼란과 불안감으로 더 이상 이전의 철학적 기반과 사상이 도움을 주지 못할 때 탄생한 철학이었다.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게 해줄 만한 실존주의적인 철학이 필요했다.
에피쿠로스는 바로 이런 시대에, 그런 사유가 가능한 철학을 했다. 그는 등장 후 500년간 지중해에서 가장 주목받았지만, 동시에 가장 멸시받은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만큼 파격이었고, 그만큼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어주었다. 혁명의 철학자 마르크스도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를 박사 학위 논문 제목으로 정하고, 그의 철학 안에 담긴 역동성을 깊이 받아들였다.
서양의 노자, 에피쿠로스를 통해 배우는
평정심을 키워 행복에 이르는 길
“진정한 행복은 방탕과 욕망 충족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두 단어로 요약하자면 ‘아타락시아’(마음이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평정한 상태)와 ‘아포니아’(몸 고통의 부재)이다. 이렇듯 마음의 평정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쾌락’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삶을 누리기 위해 야심과 경쟁으로 마음의 평정을 해칠 수 있는 삶을 멀리하고, 모든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났을 때 얻어지는 최고의 쾌락을 인생의 유일한 본성적인 목적으로 삼아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고자 했다. 또한, 최고의 쾌락 상태인 ‘아타락시아’를 누리는 데는 현세의 삶만으로 충분하므로 내세나 영생을 바랄 필요가 없고, 실제로 인간 영혼과 육체는 모두 물질적인 것이므로 결국은 해체되어 죽음을 맞이하고, 내세나 영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주는 원자와 허공으로 이루어져 있고, 천체들과 신들과 인간 영혼을 비롯한 만물은 원자로부터 생성된다고 보았다. 오직 원자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고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물질이므로, 모든 것은 원자에 의해 생성되었다가 다시 원자로 돌아간다. 에피쿠로스가 원자론적인 우주관과 세계관, 자연학에 대한 방대한 집필을 한 것도 그러한 지식이 우리를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전히 신화 속에서 신과 연결되어 살아가던 시대에 과감히 신으로부터 독립해 나에게 주어진 것에 자족하며 살아가는 삶을 강조했던 그의 사상을 음미하다 보면, 현대의 마음챙김, 미니멀리즘, 소확행을 낳은 ‘쾌락주의’의 시원(始原)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의 방대한 사상 체계는 ‘쾌락주의’ 하나로 정리되지만, 뻗은 가지를 따라가 보면 자연주의 철학과 과학적 사고법의 시조로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행복과 성공이 단일한 기준이 아니라
여러 갈래가 있음을 알게 해주는 8편의 아티클
현대지성 클래식이 47번째로 출간한 『에피쿠로스 쾌락』은 국내 최초로 현존 원고 8편 전체를 소개하는 그리스어 완역본이다. 에피쿠로스는 300권이 넘는 책을 썼다고 하지만,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본서에 소개된 8편이 거의 유일하다.
마음과 몸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평생 평정심을 누리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라고 강조한 그의 쾌락주의 사상은 무한경쟁과 비교, 성공과 자극적인 흥밋거리를 찾아 헤매는 현대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행복과 성공이, 몇몇 소유물의 유무와 통장에 찍힌 숫자의 길이로 증명되는 것이 아닌, 더욱 다양하고 풍성한 여러 갈래의 오솔길이 우리 앞에 있음을 웅변하기 때문이다.
탁월한 고전 본문 이해와 번역으로 정평이 난 옮긴이는 에피쿠로스의 글 8편을 번역하면서 283개의 각주를 달아 일반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궁금해할 만한 부분에 친절한 설명과 주해를 달았고, 35쪽에 이르는 해제를 통해 에피쿠로스 철학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환경과 철학적 배경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썼다. 무엇보다도 단어 하나를 옮기는 데도 정확성을 놓치지 않으면서, 문장 자체를 깊이 음미할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이는 일에도 애썼다. 자, 이제 에피쿠로스가 남긴 몇 마디를 마음에 담아보고 자유로움의 바다에 빠져보자.
“우리는 가지지 않은 것을 바라다가 가진 것까지 망쳐서는 안 되고, 우리가 지금 가진 것도 전에 우리가 바라던 것이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자유로운 삶은 큰 부를 얻을 수 없다. 대중이나 권력자들에게 예속된 삶을 살지 않고 큰 부를 얻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충분히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운이 좋아 큰 부를 얻게 된다면, 그 부를 이웃들에게 나눠 주어 그들의 호의를 얻기도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