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온난화 - 더 많은 사람들이 연결될수록 세상이 나아진다는 착각
당신은 소셜미디어를 믿습니까?
〈가디언〉 출신 저널리스트 찰스 아서가 야심 차게 내놓은 ‘서늘한 고발장’!
★★★ 디지털 칼럼니스트 박상현 추천
“누구도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소셜온도가 올라가고 있다.”
소셜미디어가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낙관했다. 다수 시민이 자신의 목소리로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열린 광장이 되어주리라 기대했다. ‘아랍의 봄’ 시위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목소리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을 때, 이런 희망이 실현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소셜미디어에서 우리는 즉흥적으로 서로를 부정하며 계속해서 충돌한다. 잘못된 정보와 허위 정보를 내세운 선전선동이 빛의 속도로 퍼져 나가고 분노는 무기가 되어 서로를 찌르는 데 이용된다. 검증된 지식과 건전한 토론이 사라진 상황에서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휘둘린다. 내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끊임없이 추천해주는 알고리듬에 갇혀 확증편향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같은 거대한 테크 기업들은 이 사태를 수수방관하며 수익 창출에만 골몰하고 있다.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서 과학과 테크놀로지 분야만 30년 넘게 파고든 저자 찰스 아서는 이 모든 흐름에 ‘소셜온난화(Social Warming)’라는 이름을 붙였다. 폭발적인 성장과 발전을 불러온 산업혁명 이후 쉴 새 없이 배출된 온실가스가 기후변화를 일으켜 지구온난화, 나아가 기후재앙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더 쉽게 표현하고 연결된 탓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게이트키퍼 대신 사람들의 분노를 이용하려는 세력이 득세하며 사회의 온도를 올리고 들끓게 만들고 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양극단에서 과격해지는 사람들
대관절 소셜미디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소셜온난화는 세 가지 요소가 상호 작용하면서 발생하고 있다. 첫째, 2007년 아이폰이 등장한 이후 불과 10여 년 만에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던 시대에서 전 세계 인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스마트폰을 보유한 시대로 바뀌었다. 스마트폰은 담배의 완벽한 대체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시간이 빌 때면 어김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댓글이 뜨는 화면을 휙휙 넘긴다. “그것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고, 그것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그것을 빨아들이면서 긴장을 푼다.” 그리고 스마트폰 사용자 대부분은 소셜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으며 페이스북, 트위터, 왓츠앱(한국에서는 카카오톡으로 대체할 수 있겠다), 유튜브 등을 쓰지 않으면 어느 정도 사회적 단절을 감수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둘째, 소셜미디어 플랫폼들이 사람들의 ‘주목(attention)’을 끌어들이는 게시물이 뭔지 알아내서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참여(engagement)’를 유도하는 알고리듬을 개발했다. 이는 상단에 노출된 콘텐츠들을 계속 증폭시키는 한편, 사용자들을 더 자주 로그인하게 하고 더 오래 연결 상태에 머무르게 만든다. 문제는 알고리듬에 인간과 같은 도덕 관념이 없다는 점이다. 알고리듬은 그저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해 가장 큰 반응을 보일 만한 콘텐츠만을 무작정 찾아서 상단에 추천한다. 그리하여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추천된 게시물을 중심으로, 극단주의자들은 서로를 더 잘 찾을 수 있게 되고 분노한 사람들끼리 더 열렬히 동조하게 된다. 예전 같으면 세력화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규합하여 실제 행동에 나서는 데 이른 결과, 소셜미디어에 각종 혐오 발언과 과격 행동이 넘쳐난다.
셋째, 이런 현상에 대한 규제나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야 비즈니스가 유지되고 성장을 담보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검열’을 금지하는 법 조항과 방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료’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소셜미디어 플랫폼들의 주된 돈벌이 수단은 광고다. 그렇기 때문에 광고가 최대한 잘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그 기업들에는 매우 중요한 과제다. 사람들의 주목과 참여를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가짜 뉴스가 퍼져 나가고 선전선동이 난무한다고 해도, 그 알고리듬을 손봄으로써 손해를 봐야 한다면 기꺼이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1996년에 통과된 미국의 통신품위법 제230조가 게시물의 주인은 글쓴이지 사이트 운영 주체가 아니라고 규정함에 따라, 플랫폼 사업자들은 ‘선의’로 콘텐츠를 관리할 수는 있으나 이용자들이 적법하지 않은 내용을 올렸다고 해도 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된다. 그리하여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는 공식적으로 “혐오 그룹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항변하면서도 그런 콘텐츠들에 적극적인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그런 콘텐츠들에 광고가 더 많이 붙기 때문에.
소셜미디어는 어떻게 선거를 망치고 정치를 양극화하는가?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안티백서는 어쩌다 세상을 혼란에 빠뜨렸는가?
급기야 소셜미디어에서 형성된 여론이 실제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벌어졌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미국과 필리핀의 대통령 선거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런 첨예한 정치 이벤트가 있을 때, 소셜네트워크는 편가르기의 장으로 돌변해버린다. 정치가 발전할수록 대부분 양당제로 귀결되는 정치 체제 아래서 이쪽 후보를 뽑을 것인가 저쪽 후보를 뽑을 것인가. 어떤 의제에 대해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분노에 찬 정치인이 논란이 될 만한 극단적인 발언을 소셜미디어에 쏟아낼수록 그는 더 큰 반응을 얻고 주목을 받는다. 그리하여 사실 검증과 타협적 토론은 실종되고 격정적이고 조직화된 정치적 양극단이 서로를 비난하며 과격화된 입장들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고 만다.
정치 세력들은 이런 현실을 절묘하게 이용한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캠프는 전례 없이 대규모로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캠페인을 펼쳤다. 트럼프는 끊임없이 트위터에서 존재감을 과시했고 그의 캠프는 공격적으로 디지털 광고를 집행했다. 그리고 그 콘텐츠들은 소셜미디어 알고리듬의 영향으로 엄청나게 증폭되었고 중도층의 투표에 실제로 영향을 주는 데 성공했다. 트럼프 진영 디지털 캠페인 책임자였던 브래드 파스케일이 “페이스북과 트위터 덕분에 우리가 승리했다”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할 정도다.
비슷한 비극이 코로나19 백신접종을 둘러싸고도 발생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에서 백신 반대 커뮤니티가 조직되었고, 그들은 중력장 비슷한 역할을 해서 백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백신의 역사나 백신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그렇게 그들을 끌어들여 ‘백신접종을 망설이는’ 또는 ‘백신접종에 회의적인’ 사람들로 만들었다가 결국 일부는 열렬한 안티백서가 되게 한다. 안티백서들은 기본적으로 기관들, 재단들, 과학 공동체들의 신뢰성을 끊임없이 공격하면서 사람들의 불안을 이용하고 의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사회를 분열시킨다.
선거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 한없이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던 소셜미디어 기업들은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입장을 바꿨다. 코로나19에 대한 거짓 정보를 적극적으로 차단하고 공인된 내용을 더 잘 보이도록 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조치만으로는 ‘우회하는’ 콘텐츠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모으는 경우들을 통제할 수 없다. 다른 음모론이나 유사과학을 추종하는 사용자들이 결집하여 코로나19 및 백신과 관련된 허위 정보를 공유하고 퍼뜨리는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다시 말해 증폭의 알고리듬과 바이럴이 결합하는 현재 상황을 방치하면서 땜질 처방만 내놓는 한, 소셜온난화 문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소셜온난화, 돈 버는 사람 따로 있고 대가를 치르는 사람 따로 있는 불공평한 재난
이제 ‘고장 난 도구를 재설계하고 개조’해야 할 때!
이 책의 추천사를 쓴 디지털 칼럼니스트 박상현은 이 모든 흐름을 ‘소셜온난화’라 부른 것은 아주 적절하면서도 영리한 명명(命名)이라 평하면서 지구온난화와 소셜온난화의 공통점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두 개의 온난화 모두 단순한 오염 혹은 현상에서 끝나지 않으며 되돌리기 힘든 재난이 되어가고 있다. 전 세계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듯 보이지만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또한 정작 온난화에 덜 기여한 가난한 나라들이 더 큰 피해를 입고 있다는 특징도 있다. “돈 버는 사람 따로 있고, 대가를 치르는 사람 따로 있는 불공평한 재난”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진국이 안전지대라고 장담할 수 없으며, 몇 년 후에는 선진국도 두 개의 온난화의 영향으로 각종 위협에 적나라하게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매일 약 18억 명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한다. 인스타그램과 왓츠앱 사용자까지 더하면 한 달에 총 사용자 수는 중복을 제외하고도 30억 명 이상이다. 트위터에는 매일 전 세계에서 1억 9000만 명이 접속한다. 유튜브에서는 매일 약 50억 편의 동영상이 시청되며 한 달 동안 20억 명 이상이 그 사이트를 방문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모바일 앱인 카카오톡 월간 사용자 수는 4500만 명이 넘는다.) 이 수많은 사용자들의 힘으로 테크 대기업들은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 즉 소셜온난화는 외면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애플의 매킨토시 프로젝트의 초기 구성원이자 스티브 잡스의 고문이었던 조애나 호프먼이 한 말은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아시다시피, 이건 담배 같은 거예요. 아편과 다를 게 없어요. 우리는 분노에 중독성이 있다는 걸 알고, 사람들을 충분히 열받게 만들면 우리 플랫폼에 끌어와서 참여하게 할 수 있다는 걸 압니다. (중략) 제가 묻고 싶은 건 이겁니다. 얼마나 엉망이고, 얼마나 무지하고, 얼마나 기만적인 건가요?”
물론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크가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다만 이대로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소셜온난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지금 무엇을 해볼 수 있을지 논의하기 시작해야 한다. 저자는 소셜네트워크의 규모를 무제한으로 늘리려는 소셜미디어 플랫폼들의 행보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갖고 있는 테크 대기업들에 규제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업들은 ‘위험한’ 광고나 콘텐츠를 걸러내는 알고리듬을 개발해서 (추가 고용 없이)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려 할 것이 아니라 엄격하고 윤리적인 가이드라인을 숙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고용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사람들의 경쟁 심리와 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각종 ‘숫자 표시’ 기능을 덜 써야 한다고 제언한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고장 난 도구를 재설계하고 개조”해야 한다. 이 책은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울리고 행동을 촉구하며 이렇게 호소한다. ‘눈을 뜨라’, ‘깨어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