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화폐전쟁
■ 현금과 중앙은행을 무력화하는
디지털 화폐의 위협과 화폐 경제의 미래
현금은 많은 장점을 지닌 지불수단이다. 익명성이 보장되고, 지불을 위한 사전 준비과정이 필요 없으며, 지출의 통제가 용이하다. 은행이 파산해도 위협받지 않고, 마이너스 금리 및 기타 문제에 영향받지 않으며, 지불에 별다른 추가비용도 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장점이 은행, IT 기업, 국가, 그리고 일부 상인들에게는 단점으로 작용한다. 특히 현금폐지론자들은 현금의 익명성이 범죄에 악용된다는 근거로 현금 폐지를 주장한다. 마치 현금을 퇴출시키면 범죄와 탈세, 테러를 막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거액의 불법자금 조성과 자금세탁은 대부분 디지털 화폐로 이루어진다.
비자와 마스터카드는 현금 사용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자동 지불 수단이 얼마나 편리하고 현대적인지를 역설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정부 또한 현금과 멀어지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은행은 현금인출기를 줄이고 인출 수수료를 책정하는 등 그 흐름에 가담한다.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움직임이 감지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말라위, 나이지리아, 필리핀, 멕시코 등은 심지어 기꺼이 현금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고 선포했다. 현금과의 전쟁 선포와 동시에, 해당국 정부에는 국민의 생체정보를 다루는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금융포용financial inclusion과 디지털 아이덴티티digital identity라고 불리는, 서로 긴밀히 연결된 글로벌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된다. 현금 사용은 점점 불편하도록, 그래서 정부와 금융회사들이 점점 더 많은 정보를 가져갈 수 있도록 구조가 개편되고 있는 것이다.
마스터카드의 현금 퇴출 운동은 선진국보다 개발도상국 및 신흥개발국에서 훨씬 더 조직적으로 추진된다. 비공식적인 반反현금 규칙에 자발적으로 따르지 않는 국가는 보조금을 못 받거나 비협조적인 국가 리스트에 오를 수 있다. 현금 퇴출이라는 이슈와 생체인식 방식에 의한 데이터 수집에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는 국가는 세계은행과 IMF의 검증 평가에서 나쁜 점수를 받을 것이며, 불리한 경제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빌 게이츠 재단은 개발도상국의 중앙은행들을 지원하기 위해 마스터카드와 비자의 기술 지원과 더불어 디지털 지불수단을 개발하기 위한 ‘금융포용동맹’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후 규모가 큰 여러 국가에서는 신분증 기능을 하는 마스터카드사의 지불 카드가 출시됐다. 가난한 케냐 국민들이 영국에서 통제하는 모바일 머니 공급자에게 거래 비용의 40퍼센트까지 건네줘야 하는 상황을 만든 데는 게이츠의 포용동맹 또한 공동 책임이 있다. ―본문 21쪽
이런 캠페인은 G20이 추진하고 있으며, 미국의 거대기업 및 재단과 협력하는 미국 정부가 주도한다. 이들이 공동으로 결성한 ‘금융포용을 위한 세계적 협력체’의 목표는 지불 방식의 디지털화를 관철하고 전 국민을 생체인식-디지털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 협력체에는 일련의 민관동맹이 관여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마스터카드와 비자,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주인 빌 게이츠 재단, 그리고 미 국무부와 더불어 ‘현금보다 좋은 동맹Better Than Cash Alliance’이 핵심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 21세기 화폐전쟁
전체주의를 향한 현금 철폐 작전
맥킨지의 연구에 따르면 금융 산업은 결제가 완전히 디지털화될 경우, 매년 4,0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직접비용을 절감할 것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고객층은 연간 4조 2,000억 달러의 소득 증대를 올릴 수 있다. 게다가 디지털로 금전 거래가 이루어지면 엄청나게 가치 있는 데이터가 발생한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갖고 있는지, 정확히 어디에 지출하는지에 대한 데이터다. 앙겔라 메르켈의 말대로, 데이터는 21세기의 천연 원료인 셈이다. 세계의 거대자본이 선점하려 혈안이 된 이유도 그래서이고, 그 옛날 석유가 그랬듯이 오늘날 석유왕의 지위는 MS와 알파벳, 아마존, 애플, 페이스북 및 이들의 중국 협력사인 바이두와 알리바바, 텐센트가 차지했다. 그리고 이들은 국제원조라는 미명하에 ‘현금보다 좋은 동맹’, 빌 게이츠의 ‘금융포용동맹’과 연합하여,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와 가장 가난한 나라들부터 공략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들의 활약상은 눈부실 정도다.
▷ 케냐에서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엠페사’라는 통화체계가 구축됐다. 당시 주민 10만 명당 은행지점은 1.5개, 현금인출기는 단 하나뿐이던 케냐는 통신사 ‘사파리컴’을 통해 모바일계좌를 개설하는 것으로 시작, 2018년 현재 사파리컴은 케냐 전체의 전화 통신과 문자 서비스 수입의 약 90%, 그리고 2,800만 명에 이르는 모바일 이체서비스 이용자의 80%를 차지했다. 그리고 여기서 발행한 이익은 대부분 사파리컴의 모기업, 영국의 이동통신사인 보다폰이 가져간다.
2017년 케냐 정부는 모든 통신 내용에 정부가 접근할 수 있도록 이동통신사에 명령을 내린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민의 전반적인 모바일 이체를 감시할 수 있게 됐다.
▷ 2016년 11월 8일. 인도는 이 날 자정부터 최고 고액권인 500루피와 1,000루피 지폐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기습 발표했다. 이 같은 ‘통용폐지’에 따라 당시 유통 중이던 현금의 85%는 갑자기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사람들은 유통 중지된 지폐를 연말까지 은행에 입금해야 했는데 고액일 경우엔 돈의 합법적인 출처를 증명해야 했고, 그러지 못했을 땐 그 돈을 쓸 수조차 없었다. 갑작스러운 현금 고갈로 수많은 인도인은 엄청난 고초를 겪었으며 생존을 위협받았다. “목표는 지폐를 모아서 디지털 계좌로 이체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현금 없는 사회입니다.” 온갖 비난과 아우성에도 이를 강행한 인도의 모디 총리의 당당한 선언이다.
▷ ‘디지털 금융 생태계의 튼튼한 성장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명목하에 필리핀 정부는 디지털결제의 20배 확장을 위한 이페소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정부와 유관기관은 차후 오로지 디지털결제만 가능하고, 시민과 기업 결제를 무현금으로 전환하는 사업을 진행한다. 이후 필리핀의 노숙자들은 현금이나 현물 대신 전자결제카드를 받았다. 이 프로젝트는 중앙은행이 진두지휘한다.
선진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 현대적인 디지털화의 모범으로 소개되는 북유럽 국가의 현금입출금기는 대형은행의 합법화된 카르텔에 의해 운영된다. 이 카르텔은 현금을 인출할 수 있는 장소를 대폭 줄여놓았다. 이미 2007년에 핀란드인은 인구 10만 명당 38대의 현금인출기로 버텨야 했는데 2016년이 되자 이마저도 26대로 줄었다. 2016년에 34대뿐이던 스웨덴은 이제 대다수 은행 지점이 현금을 받지도, 내주지도 않는다. 스웨덴 북부의 드넓은 지역에서 현금 입출금이 가능한 은행을 찾으려면 40킬로미터 이상 이동해야 한다. 특히 대폭 감소를 보이는 덴마크와 네덜란드는 2007년 이후 인구 10만 명당 70대던 것이 48대로 줄었다. 이렇듯 비싼 수수료에 접근마저 어려워지면 의도적으로 조장한 불편은 크게 부각될 것이고, 그에 비해 저렴하고 편리한 무현금결제를 홍보하는 것이 다음 수순이 될 것이다.
■ 화폐전쟁의 전제조건
생체 인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라
금융포용은 현금폐지의 또 다른 이름인 동시에, 사람들의 생체정보를 중앙 또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하게 하는 캠페인 구호이기도 하다. 일단 생체정보가 중앙정보장치에 저장되면 통신기기를 사용한 활동에서 어느 누구도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
서구 민주주의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조화’를 내세운 슬로건, ‘한 사람의 ID가 모든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서로 결합한다’라는 것은 주민센터나 의료기관, 보험사, 개인시설의 정보가 모두 결합됨을 뜻한다. 이는 곧 어떤 정보가 업데이트될 때, 그 변동 사항이 모든 나라에 즉시 입력된다는 말이다. ‘한 개인의 ID 번호가 평생 모든 용도에 원칙이 된다’는 것 아닌가. 그야말로 완벽한 공포가 아닐 수 없지만, 이미 이 시나리오는 세계 곳곳에서 엄연히 진행 중이다.
▷ 미국은 이미 2008년에 25개국과 생체인식 데이터 교류를 위한 쌍방 합의를 이루었다. 국무부는 외국의 정치 지도자가 워싱턴에 올 때마다 그런 협정에 서명하도록 한다.
▷ 2015년, 빌 게이츠는 워싱턴의 ‘금융포용포럼’에서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아프리카에 광범위한 ID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자기 재단이 중앙은행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가 세계적으로 인구가 많은 나라부터 (그가 접근하지 못하는 중국은 제외하고) 먼저 접근한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다.
▷ 세계은행은 ‘개발을 위한 ID’라는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빈국을 대상으로 생체인식 기반의 ID와 중앙데이터베이스를 전 세계로 확산시키려는 생각이다. 물론 이 프로그램 또한 주로 미국의 대기업과 재단이 관여하는 가운데 민관협력이라는 외형을 갖췄다. 이 프로그램 역시 게이츠 재단이 지원한다.
▷ 나이지리아 정부는 게이츠 재단과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아 성인 전체 인구 1억 2,000만 명에게 정부의 생체인식 데이터베이스에 가입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2018년 2월, 생체인식 기반의 ‘국민 ID 번호’만이 모든 은행 거래를 위한 유일한 신원확인 방식임을 선언했다.
▷ 2018년 2월에는 요르단과 시리아의 인접국에서 시리아 난민 230만 명이 생체인식 방식으로 등록되었다. 여기서 선택한 수단은 홍채 인식 스캐너였다. 구호 단체인 옥스팜에 따르면, 이미 2017년에 43개국에서 400만 명의 난민 대부분이 유엔 기구와 협력 기관에 의해 생체인식으로 확인되었다.
기술의 발전은 인류를 유토피아로 이끌 수 있는가? 전 세계적으로 시시각각 현금이 사라지고 있는 현재 상황은 자연스럽게 도래한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막강한 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진행된 시나리오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들의 논리에서 벗어나 현상을 제대로 보라고 일갈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디지털 방식으로 저장되는 세상에서, 현금만이 자주성과 프라이버시를 보호받는 유일한 수단이자 가치를 갖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 리뷰 및 코멘트 ★★★★★
중대한 전략지정학적 목표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피해 계획되고 추진되었는지 정밀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의 눈을 뜨게 만든다. ―디르크 뮐러/재무전문가·독일외교협의회 의장
우리 모두를 시스템 안에 가두려는 세계적 음모의 장막 너머를 꿰뚫어보는 눈 ―사라 바겐크네히트/경제학자·정치가
전 세계적으로 각국 정부와 대기업들이 어떻게 담합하여 현금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를 폭로한다. 현금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자유도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슈피겔》
현금을 폐지하려는 흐름은 어떻게 전체주의적 감시로 이어질 것인가. 저자는 엄청난 자료와 연구 등을 통해 그 맥락을 명료하게 제시한다. ―《빈 자이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