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세월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영 아닌 것 같다가 좋아지는,
그런 관계도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위스키가 그러하듯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게 만드는 술, 그리고 사람의 온기
구례 간전은 해가 짧다. 앞으로는 지리산이, 뒤로는 백운산이 높이 솟아 있어 금세 날이 저문다. 쭈뼛거리던 뒷산 그림자가 슬그머니 집 앞마당을 삼키고 섬진강에 다다를 때쯤이면 고라니 울부짖는 소리만 이 산에서 저 산을 오간다. 그리곤 이내 완전한 어둠. 가로등도 없는 섬진강변 도로를 간혹 뜨내기 여행객들의 차가 소리 없이 지날 뿐이다.
하지만 어둠이 짙어질수록 환하게 빛을 발하는 집이 있다. 바로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이다. 정지아 작가의 집은 불이 쉬이 꺼지지 않는다. 낮보다는 밤에 글을 쓰는 작가의 습관 때문이다. 작가를 비롯해 고작 네 가구가 머무는 작은 마을에서는 밤새 소쩍새 소리보다도 더 길게, 타닥타닥 작가의 타자 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야말로 긴긴밤이다.
그 기나긴 밤을 외롭지 않게 하는 건 ‘술’이다. 정지아 작가는 소문난 애주가다. 술을 많이 마신다기보다는 마셔야 할 때 마실 줄 안다. “바람이 좋아서, 비가 술을 불러서, 저 찬란한 태양이 술을 마시라 해서, 눈발이 휘날리는데 맨정신으로 있기 힘들어서…” 그리고 사람이 있어서. 정지아 작가의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그만큼 밤늦게 불이 켜져 있는 시간도 길다. 어렸을 적 고향에서, 수배 길에서, 강단에서, 그리고 먼 이국에서 술 한잔을 사이에 두고 벽을 허문 사람들. 이 책은 정지아 작가가 그 오랜 시간 마주했던 술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날로부터 나의 변절과 타락이 시작되었다.
참으로 감사한 날이지 아니한가!”
자본주의 종주국의 위스키를 들고 지리산을 누비는 빨치산의 딸, 정지아
사회주의자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늦둥이 딸이 처음 술을 입에 댄 건 열아홉의 크리스마스이브, 눈이 펑펑 쏟아지던 겨울날이었다. 집에서 친구들과 밤새 놀기로 한 딸에게 부모님은 직접 담근 매실주를 내어주곤 화투를 친다는 핑계로 집을 비운다. 그렇게 소복소복 눈 쌓이는 소리를 들으며 십 대의 마지막 겨울을 보낸 정지아 작가는 세상을 뒤덮은 백색의 순수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 “이토록 순수하게, 이토록 압도적으로 살고 싶다”고.
그러나 빨치산의 딸에게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독재정권으로부터 늘 감시의 대상이 되었던 작가는, 결국 수배를 받고 긴 도망길에 오른다. 자본주의 종주국의 술 위스키를 처음 맛본 건 수배 중 다른 이의 눈을 피해 오른 지리산에서였다. 위스키를 챙겼던 건 오로지 가볍고 빨리 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겨울 늦은 밤, 뱀사골 산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작가는 남몰래 패스포트를 꺼내어 마시다 그만 정체가 발각되고 만다. 그런데 정지아 작가를 알아본 사람들 역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군부독재에 저항하던 전사들이었고, 그들은 그렇게 위스키에 취해 잠시나마 자유와 연대의 밤을 보낸다.
몇 년 뒤, 세상으로 나온 작가는 “가난과 슬픔과 좌절로 점철된” 지난날들과 작별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틈으로 스며든다. 과거의 끄트머리를 잡고 있기보다는 아버지의 말씀처럼 앞으로의 역사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고, 소설을 통해 자신의 역할을 다하자 다짐한다. 그래도 작가는 외롭거나 슬프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좋은 술이 있었고, 그보다 좋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나는 당신이 좋다. 좋은 사람이니까.
당신도 나도 술꾼이니까.”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무는 도수 높은 이야기들의 향연
사실 정지아 작가는 “친구 사귀는 데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10년쯤은 만나야 아, 친구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벽을 세운다. 그런 작가에게 술은 단순히 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나오는 아프리카 초원 어딘가의 사과나무처럼, 그 사과나무의 열매를 먹고 취해 사자의 대가리를 밟고 날아오르는 원숭이처럼, 술은 자신의 한계를 깨부수게 하는 날개다. 좋은 술과 함께하는 날이면 정지아 작가는 겁 없이 한 걸음 더 사람 곁으로 다가간다.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에는 그렇게 술잔을 부딪히며 벽을 허문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추억을 공유한 채 지금은 제각기 서로 다른 비극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고향 친구들, 날실과 씨실처럼 오해와 이해를 반복하며 우정을 쌓아온 오랜 선후배들, 무심한 표정으로 뜨거운 손을 내밀었던 은사님들과 그들처럼 제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던 스승으로서의 바람, 사랑과 그리움 사이 어느 지점을 같이 거닐었던 인연까지.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분명 독자들도 가슴 깊이 보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머물지 않는다. 멀리 일본으로, 베트남으로, 몽골로 날아가 우리가 외면하고 살아가는 역사의 비극적 단면을 떠올리게 한다. 북한에서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등장하는 김 선생님의 소식을 듣고, 보위부 간부와 술 대결을 펼쳤던 장면은 이 책의 백미다. 술과 사람이 있는 곳은 어디든 다 비슷하단 걸, “그 금단의 땅 북한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걸 작가는 알려준다.
정리하자면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는 술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보다는 술을 둘러싼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 사람은 이 책의 저자인 정지아 작가이기도 하고, 지금 이 서평을 쓰는 편집자이기도 하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담컨대, 당신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이면 분명 빈 술잔을 매만지며 술꾼으로서의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은 당신에게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