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가즈오 이시구로가 건져낸 시간의 모래톱에 숨겨진 보물
코로나가 전 세계를 휩쓸었던 시기, 영국의 한 언론이 전 세계의 유명인들에게 고립되고 외로운 코로나 시기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을 추천해달라고 청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책을 추천했지만 그중 단연 화제가 되었던 것은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이자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추천사였다. “내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고양적이며 삶을 긍정하는 책”이자 “일상적 삶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운 존엄성이 이보다 섬세하게 포착된 경우는 드물다”라던 이 책은 바로 1931년 출간되어 복간과 절판을 거듭했던 책 『구월의 보름』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헌사를 계기로스크리브너사는 이 책을 특유의 정취를 되살려 복간했고 90년 만에 우리 곁에 돌아와 다시금 전 세계의 언론과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내가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고양적이며 삶을 긍정하는 책이다. 1931년 출간된 이 책은 평범한, 조금은 쪼들리는 가족이 그들의 화려할 것 없는 여름휴가를 준비하고, 이동하고, 또 즐기는 이야기를 고도로 정교한 솜씨로 풀어낸다. 이 책에서는 거의 어떠한 극적인 사건도 없다. 그러나 작가는 무엇이 재미있고, 무엇이 재미없는지에 대한 우리의 기준을 마술처럼 재정립해 우리가 이 가족들의 감정에 온전히 조음하게 만든다. 그는 절대 주인공들을 위에서 내려다보지도, 그 존재 이상으로 추어올리고 신성시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주인공들의 서로와 타인에 대한 본능적인 예의와, 개인적인 좌절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자의식에 휘둘리지 않으며 불완전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는 품성에 주목하고 존중한다. 일상적 삶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운 존엄성이 이보다 섬세하게 포착된 경우는 드물다.
가즈오 이시구로(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저자소개
(R. C. Sherriff)
1896년 햄프턴 위크에서 보험회사의 사무직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신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즉시 보험회사에 취업했으나 1차 대전이 발발하며 입대했다. 서부전선으로 보내졌던 그는 폭탄의 여파로 콘크리트 52조각이 몸에 박히는 부상을 입고 본국으로 송환된다. 참전 당시 가족과 일상에 대한 절박한 그리움을 담아 부모님께 매일 보냈던 편지가 문학 세계의 기초가 되었다. 제대 후 다시 보험회사에 복직한 후에도 계속해서 글을 썼고 이프르의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희곡 「여행의 끝Journey’s End」(1928년)을 집필했다. 극장들에게 계속해서 거절당하던 이 작품은 우여곡절 끝에 웨스트엔드의 아폴로 극장에서 젊은 로렌스 올리비에를 주인공으로 상연되었고 곧이어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전쟁의 참상과 지난함을 다룬 이 작품은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1차 대전을 다룬 희곡 중 단연 고전으로 자리매김했으며 교과서에도 실렸다. 마침내 셰리프는 전업 작가로 살 수 있게 되었으나 이어진 희곡들은 모두 실패를 거뒀다.
어느 날 바닷가를 찾은 그는 지나가는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는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불과 몇 주 만에 쓴 그 이야기가 셰리프의 첫 소설인 『구월의 보름』이다. 어떤 기대도 품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쓴 작품이었으나 출간 즉시 평단과 독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으며 여러 나라로 수출되었다. 그는 이후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며 두 차례에 걸쳐 BAFTA 각본상,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올랐으나 활동을 접고 귀국했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 살다가 1975년 세상을 떠났다.
「여행의 끝」이 참호에서 보고 겪은 것들을 담았다면 『구월의 보름』은 참호에서 돌아가기를 꿈꿨던 것들을 그린 작품이다. 절판 이후에도 복간을 거듭하며 애호가들 사이에 입소문으로 알려졌던 이 작품은 2021년 가즈오 이시구로의 극찬을 받으며 ‘일상사의 명작’으로서 그 자리를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