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력 설계자들 - 몰입의 고수들이 전하는 방해받지 않는 마음, 흔들리지 않는 태도
“수도자들은 왜 사다리를 올랐을까?”
방황하는 마음을 잠재울 중세 천년의 지혜
수도자들은 산만함을 이야기하며 ‘방황’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지나치게 관심을 끄는 것들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 “갈수록 쇄도하는 정보”, “감시자본주의” 등을 산만함의 주요 원인으로 꼽는 현대에도 이는 유효한 진단이다(5쪽). 이러한 방황을 끝내고자 수도자들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 적절한 도구를 개발했으니, 이를 ‘집중의 사다리’라 한다.
[거리 두기: 평생을 바칠 첫걸음]
집중의 사다리는 여섯 개의 가로대로 구성되는데, 그중 첫 번째가 거리 두기다. 곧 나를 산만케 하는 모든 것과 작별하는 일이다. 최근 유행하는 ‘디지털 디톡스’가 대표적이다. SNS상의 넘치는 관계를 정리하거나, 스마트폰을 멀리하는 일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수도자들은 더욱 멀리 나아갔다. 우선 재산을 포기했다. 어떤 이들은 ‘내 것(mine)’이라는 표현조차 쓰지 않았다(44~46쪽). 재산의 포기는 가족의 부양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인간관계도 정리되었다(41~44쪽).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한 수도자들은 수 미터 높이의 탑 위로 기어올라가 독존의 상태를 완성했다! 5세기에 활동한 시메온의 탑은 2미터에서 시작해 20미터까지 높아졌다(59~60쪽, 118~120쪽). 그에게 중요한 것은 탑 자체가 아니라 ‘계속해서’ 오르는 행위였다. 즉 산만함과의 싸움은 중단될 수 없었다.
[함께하기: 격려와 감시의 공동체]
반면에 어떤 수도자들은 수도원에서 함께하기를 택했다. 같은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이들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격려와 위로를 얻었다. 이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잠시나마 함께 수행하는 ‘템플 스테이’부터 묵묵히 공부하는 모습을 공유하는 ‘공부 브이로그’까지, 함께하기의 현대적 버전을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집중은 “영생과 죽음의 문제”인 만큼, 당근뿐 아니라 채찍도 필요했다. 하여 수도자들은 빈틈없이 짜인 일과가 잘 지켜지는지 서로를 감시했다. 그들의 일과는 평범한 시간표의 차원을 넘어 삶의 모든 것을 규정했다. 자는 법과 독서하는 법(81쪽), 기도하는 법(85~87쪽)은 물론이고, 심지어 생각하는 법(89쪽)과 말하는 법(93~94쪽)까지 정해져 있었다. 특히 육체노동은 종류별·구성원별·계절별 등으로 세분화되었는데, 수도원에서 기르는 개조차 할 일을 부여받았다(82~85쪽).
[심신 수행: 욕구를 다루는 법]
수도자들은 평생 함께할 수밖에 없는 동료인 몸과 마음의 조화에 특히 신경 썼다. 이는 현대인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인 웰니스와 일맥상통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 또한 식이요법부터 수면까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106쪽).
문제는 불쑥 튀어나오는 욕구였다. 1500년 전에는 이를 산만함의 원인으로 여겨 억눌렀다. 씻지 않는 것이 가장 흔한 시도였다. 사막 교모인 실바니아는 평생 몸에 물을 묻히지 않았다(111~113쪽). 푹 자지 않으려고 서 있거나 의자에 앉아 밤을 보낸 수도자들은 당대의 스타였다(116~121쪽). 허기로 산만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마치 연료를 채우듯 먹는 건 수행의 기본이었다(131~133쪽). 이 모든 걸 마스터한 수도자도 성욕은 버거웠다. 개중 너무나 절박한 이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스스로 거세했다(126~129쪽).
[독서: 악마의 공격 맞받아치기]
우리는 으레 독서가 집중력을 높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독서가 인지 능력을 관장하는 전두엽과 해마의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신경과학 연구가 많다. 1500년 전의 수도자들 또한 특유의 통찰을 발휘해 독서가 집중력을 끌어올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수도자들은 한시도 책을 놓지 않았다. 직접 책을 읽을 수 없을 때는 당번을 정해 대신 낭독하도록 했다(151쪽). 이 중세의 오디오북이 중요했던 이유는 악마의 공격이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마는 얼음처럼 차가운 손으로 수도자의 눈과 머리를 쓰다듬어 잠에 빠지게 하고(25쪽), 과거의 화려했던 생활을 문득 떠오르게 하며(152쪽) 집중을 방해했다. 수도자는 책, 특히 성경에서 그 공격을 맞받아칠 구절들을 끊임없이 찾았다. 이 일에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시력을 잃을 뻔”한 건 기본이고(170쪽), 어느 수도자는 책상 앞에 앉은 채로 며칠 밤을 새우다가 죽고 말아 그 자세 그대로 묻혔다(151~153쪽). 그런데도 부족함을 느낀 수도자들은 쓰고 편집하고 만드는 일까지 아우르며 다양한 방식으로 책과 만났다. 이 과정에서 각종 형식의 주(158~161쪽), 타이포그래피와 인포그래픽, 레이아웃(162~177쪽) 등을 개발했으니, 오늘날의 모든 저자와 편집자, 독자는 수도자들에게 빚진 셈이다.
[명상과 메타인지: 어질러진 마음의 방 정리하기]
독서는 분명 집중에 도움이 되었으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요즘 말로 ‘정보 과부화’가 수도자들을 괴롭혔다. 그들의 마음은 평생 쌓인 온갖 기억과 책에서 얻은 지식으로 산만했다. 정기적으로 이 생각들을 정돈할 필요가 있었으니, 그 방법으로 개발된 것이 바로 명상이다. 이때 명상은 신비체험 따위가 아니라, 마인드맵 작성에 가까웠다. 수도자들은 종이 위에, 또는 머릿속에 “여섯 날개를 한 천사”나 거대한 “방주” 모양의 마인드맵을 그린 다음, 그 각 깃털과 각 방에 생각들을 분류해 넣었다(195쪽, 212~215쪽).
명상에서 더 나아간 것이 마지막 여섯 번째 가로대인 메타인지다. 현대 심리학에 따르면 메타인지란 생각을 ‘판단’하는 법이다. 이와 비슷하게 수도자들은 생각을 “분별”하는 것으로 이해했다(224~228쪽). 즉 나쁜 생각을 걸러내 상상 속의 울타리 안에 가둬놓고, 좋은 생각만 바라보려 애썼다(231~233쪽). 생각은 부지불식간에 떠오르므로, 분별 작업은 깨어 있는 내내 계속되었다. 이처럼 생각 자체에 몰두할수록 수도자들은 세상을 잊고 자기 자신을 잊어, 종국에는 집중하는 상태만이 남았다(244~246쪽).
“흔들릴 순 있어도 넘어지진 않는다”
쇠처럼 단단한 태도로서의 집중
순수한 집중에 도달한 수도자들은 기쁨과 실망을 동시에 맛봤다. 평생의 목표를 이루었지만, 그 상태가 오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도로 섬세한 과정인 데다가,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집중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집중을 깨뜨렸다. 하여 제아무리 훈련된 수도자라도 삶의 대부분은 “파리 떼, 불한당, 폭풍우 같은 산만함”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현대인은 부실한 직장 문화, 과도한 경쟁, 무엇보다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테크놀로지에서 산만함의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중세 천년을 빼곡히 채운 집중 분투기는 산만함이 “인간 경험의 고유한 특징”임을 알려준다. 신에게 집중하지 못하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종말론적 절박함”으로 각오를 다진 수도자들조차 산만함을 끝내 정복하지 못한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1500년 전에도 불가능했던 집중이, 그때보다 훨씬 소란스러운 오늘날 가능할까. 저자는 이에 대해 7세기에 활동한 아나스타시오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녀를 돌보느라 항상 정신없다고 푸념하는 어느 부모에게 그는 “어디서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답했다(260~216쪽, 263쪽). 결국 산만함과의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조건이나 기술이 아니라, “산만함이 결코 사라질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집중하려는 태도다. 쉬지 않고 집중의 탑을 기어오르는 이 “마음의 습관”이야말로, 또다시 원치 않은 생각으로 굴러떨어진 우리에게 수도자들이 건네는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