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종전의 설계자들 - 1945년 스탈린과 트루먼, 그리고 일본의 항복

종전의 설계자들 - 1945년 스탈린과 트루먼, 그리고 일본의 항복

저자
하세가와 쓰요시
출판사
메디치미디어
출판일
2019-08-23
등록일
2020-02-19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9KB
공급사
우리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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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태평양전쟁은 어떻게 끝이 났는가?
종전 연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기념비적 저작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 선언을 했고, 9월 2일 미주리호 함상에서 맥아더 연합국 최고사령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 조인식이 있었다. 그렇게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패배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것이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였다. 그러나 그 역사는 엄연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일본 대표단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뒤에도 쿠릴열도를 점령하기 위한 스탈린의 작전은 계속됐다. 태평양전쟁이 실제로 종결된 것은 소련이 쿠릴 작전을 완수한 9월 5일이었다.
하세가와 쓰요시는 그간 누락돼온 이 3일의 시간차에 주목한다. 캘리포니아대학 샌타바버라 캠퍼스의 역사학과 교수(現 명예교수)인 저자는 일본계 미국인이자 러시아사 전공자로, 전쟁 막바지의 분열을 단초로 태평양전쟁 종결과 일본 항복 과정을 완전히 새로 쓰는 작업에 돌입했다. 이를 위해 소련 붕괴 뒤 아주 잠시 공개됐던 기밀문서와 미국 문서보관소의 자료들을 모으고 일본 관료와 군인들의 수기 및 증언 하나하나를 파고들었다. 이 방대한 지적 여정의 결실이 《종전의 설계자들》이다.
이 책은 2005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자마자 역사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일본을 항복하게 만든 것은 미국의 원폭이었다는 기존의 통설을 부정하며 소련의 태평양전쟁 참전이 결정적인 요소였다고 과감하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원폭투하를 정당화해온 미국의 종전 신화에 도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을 비판하는 이들도 그가 증거로 제시하는 사료들까지 모두 부정해버릴 수는 없었다. 이 책은 그간 부차적으로만 거론돼온 소련의 역할에 주목해 종전사 연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일본 항복 6개월 전,
어긋나버린 전쟁의 설계도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 세 정상은 1945년 2월 11일 얄타에서 극동 문제를 논의했다. 스탈린은 그 자리에서 대일전 참전에 따르는 보상 조건을 제안했고, 루스벨트는 단 15분 만에 그 조건을 승낙했다. 당시 루스벨트에게는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소련의 참전을 얻어내는 것이 지상명령이었다. 하지만 ‘얄타밀약’으로 알려진 두 정상들 사이의 약속은 이후 전쟁 종결 과정에서 벌어진 당사국들 사이의 치열한 각축과 암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미소 간 협력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은 필리핀 전선에서 잇따른 패배, 이오지마 함락, 나아가 본토 상륙 전 최후의 요새라 할 오키나와까지 공략당하는 등 속수무책이었다. 1945년 4월, 전황은 일본에게 확실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부통령 트루먼이 제33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소련은 루스벨트가 전리품으로 약속한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태평양전쟁에 참전할 시기와 방법을 조율하고 있었다.
이후 일본 항복까지의 역사는 미국과 소련이 서로가 얄타에서 한 약속을 파기하지 않을까 의심하는 가운데 아시아에서 이권을 확대하기 위해 벌인 치열한 경쟁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와중에 일본은 소련에 기대 전쟁을 유리하게 종결짓겠다는 허황된 희망에 매달렸다. 저자는 세 플롯을 중심으로 얽히고설킨 역학관계를 대담하게 그려낸다. 대일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스탈린과 트루먼이 벌인 복잡한 암투, 전황이 불리해질수록 소련의 중립에 사활을 걸었던 일본의 패착과 그런 일본의 상황을 전쟁 준비 전까지 교묘하게 이용하려 한 소련의 책략, 그리고 일본 내부에서 하루빨리 전쟁을 종결시키려 했던 화평파와 끝까지 적의 침공에 맞서 싸우겠다는 계전파(전쟁계속파) 사이의 각축이 그것이다.

원폭투하와 소련의 참전,
‘이중의 충격’을 만들어낸 정치적 흥정과 계산들
일본의 패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각국의 군사, 외교, 정치 지도자들은 수많은 선택지에 직면했다. 워싱턴에서는 일본에 최후통첩을 보내기 전 항복 조건을 둘러싼 설전이 오갔다. 가장 큰 문제는 무조건 항복과 천황 지위 사이의 관계였다. 천황제 폐지까지 함축하는 ‘무조건 항복’을 주장하는 이들에 맞서서 국무부의 일본 전문가들은 전쟁을 빨리 종결짓기 위해서라도 항복 조건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도쿄에서는 육군성 내 ‘결전’을 부르짖는 젊은 장교들과 종전을 위해 물밑 작업을 수행하던 외무성 관료들 사이 분열이 있었다. 모스크바의 스탈린은 일본과 맺은 중립조약의 구속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얄타밀약의 전제조건인 중국과의 교섭을 어떻게 성사시킬 것인가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이러한 갈등과 분열, 과제들은 강의 지류처럼 제멋대로 전개되다가 7월 17일 트루먼, 스탈린, 처칠이 태평양전쟁 종결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 위해 포츠담에 모인 순간, 한줄기 큰 강이 됐다. 여기서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이라 할 ‘포츠담선언’이 나왔다. 스탈린도 선언문에 서명하기를 원했지만 트루먼이 거부했다. 그 시점에서 트루먼에게는 소련 참전 없이도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뉴멕시코의 앨라모고도에서 원폭실험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도착한 것이다. 회담 도중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심상치 않은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를 언급했다.
이후 트루먼과 스탈린은 서로 다른 목적에서, 서로 다른 시간표로 움직였다. 태평양전쟁의 과실을 소련과 나누고 싶지 않았던 트루먼은 소련의 도움 없이 원폭만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이 원폭투하 전에 미리 항복하는 일이 없도록 가혹한 조건으로 최후통첩을 발했고, 그 최후통첩에서 소련을 배제했다. 반면 소련에 최악의 시나리오는 자신들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이 ‘소련의 중재에 의한 평화로운 종전’이라는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치밀한 외교전을 펼쳤다. 1945년 8월, 어느 시점에선 트루먼도, 스탈린도 모두 일본의 항복을 바라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의 부정적 유산,
우리는 여전히 ‘종전’의 질서 속에 살고 있다
8월 6일, 일본이 황실 유지에 매달려 항복 시기를 미루고 있는 사이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됐고, 이틀 뒤 소련 외무부인민위원이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 앞에서 선전포고문을 낭독했다. 같은 날 두 번째 원폭을 실은 전투기가 이륙했다. 일본 고위 관료는 소련 참전 소식에 “딛고 선 땅이 무너지고” “전신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고 회고했다. 저자는 최고전쟁지도회의와 임시각의, 긴급 소집된 어전회의를 오가며 소련의 태평양전쟁 참전 소식에 일본 지도자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원폭투하 소식에도 결전을 주장하던 이들이 소련의 선전포고 앞에서는 침묵을 지켰다. 결국 소련은 얄타에서 약속받은 이권을 챙겼고, 미국은 소련의 팽창을 막을 방어막으로 일반명령 1호를 발령해 38도선 이남을 지켰다. 태평양전쟁의 마지막 장이 새로운 전쟁, 즉 냉전의 서막으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저자는 이 책의 맺음말에서 태평양전쟁 종결의 부정적인 유산에 대해 언급한다. 인류애 자체를 시험하게 만든 원폭과 북방영토 문제, 그리고 전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는 대신 스스로를 피해자화한 일본의 역사의식이 그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는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책 곳곳에서 마치 패키지 상품처럼 소련과 미국 사이를 오고간 한반도의 운명을 발견한다. 옮긴이의 말을 빌자면 우리는 일본 ‘패전’ 후의 질서가 아닌 ‘종전’ 후의 질서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종전’ 후의 질서를 설계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그 실체가 어떠했는지”를 충실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우리에게 이 부정적 유산을 극복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고 강조한다. 그 유산을 ‘떠안은’ 자들로서 무엇보다 그 유산의 실체를 알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이 책을 경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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