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한 번은 불러보았다 - 짱깨부터 똥남아까지, 근현대 한국인의 인종차별과 멸칭의 역사

한 번은 불러보았다 - 짱깨부터 똥남아까지, 근현대 한국인의 인종차별과 멸칭의 역사

저자
정회옥 지음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출판일
2022-09-27
등록일
2023-02-01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12MB
공급사
알라딘
지원기기
PC 프로그램 수동설치 뷰어프로그램 설치 안내
현황
  • 보유 2
  • 대출 0
  • 예약 0

책소개

‘흑형’은 친근함의 표현일까?
어째서 백인 혼혈은 예능에, 동남아시아인 혼혈은 다큐에 나올까?
한국은 왜 ‘차이나타운이 없는 국가’로 불릴까?
‘K-콘텐츠’에 외국인의 리액션을 기대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과거의 일만도 아니고, 소수의 일탈만도 아닌
바로 지금, 우리 곁의 인종주의 문제를 마주하다

환대를 미덕으로 여기고 정이 많다고 자부하는 우리에게 실은 ‘인종주의자’의 모습이 있다고 밝히는 책. ‘소수자 정치론’을 연구해온 저자 정회옥(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은 개화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 경제성장기, 세계화 시대, K의 시대 등 근현대사의 주요 분기를 거치며 한국만의 ‘특별한’ 인종주의가 만들어져 왔음을 밝힌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인종주의는 없다. 그렇다면 ‘인종주의 청정국’이라는 말일까. 실상은 그 반대다. 우리나라는 차별금지법 등 인종주의에 대한 법적 정의, 행위별 처벌 규정 등이 존재하지 않고, 당연히 관련된 공식 통계도 없다. 가령 누군가를 인종을 근거로 차별해도 ‘인종차별’이 아닌 단순한 ‘모욕’으로 인정될 뿐이다.
‘인종차별 없는 대한민국’이라는 집단 최면을 깨뜨리기 위해, 저자는 그 뿌리 깊은 역사를 파헤친다. 《독립신문》 같은 근대 초기의 신문부터 박정희, 김영삼 등의 대통령 훈화 말씀 그리고 최근의 유튜브 국뽕 채널까지 다양한 문헌과 매체, 인터뷰와 통계를 분석해, ‘한국식 인종주의’의 형성 과정을 추적한 것. 이 땅에서 인종주의는 식민주의, 민족주의, 순혈주의, 반공주의, 발전주의, 우월주의 등 시대별 지배 담론과 얽히고설키며 끈질기게 생명을 연장해 왔다. ‘흑형’, ‘짱깨’, ‘튀기’, ‘똥남아’, ‘개슬람’ 등 우리 모두가 한 번은 불러보았을, 또 들어보았을 수많은 멸칭이 탄생한 배경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00만여 명의 외국인이 산다. 사실상 외국인으로 취급되는 결혼 이주자, 다문화 가족의 자녀 등을 더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빠른 인구 감소, 노동자의 국제적 이동 등으로 우리는 그들과 더 자주, 더 깊이 만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다양성’은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고, 인종주의는 넘어야 할 벽이다. 벽을 넘으려면 우선 똑바로 마주 보아야 한다. 한국식 인종주의의 연원을 파헤친 이 책은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숨겨진 역사,
배제된 존재들

한국 근현대사는 대개 온갖 역경을 헤쳐나온 과정으로 설명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달성한 산업화’, ‘피로써 쟁취한 민주화’ 등은 그 자체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이력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이력 뒤에 ‘배제의 논리’가 숨어 있다고 설명한다. 한민족이 똘똘 뭉치기 위해서는 강철을 제련하듯 ‘불순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개화기에 발행된 《한성순보》 《독립신문》 등 최초의 근대적 매체들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흑형’_개화기에 수입된 반흑인성]

“흑인들은 … 동양인보다도 미련하고 흰 인종보다는 매우 천한지라.” 1897년 6월 24일 자 《독립신문》 사설은 흑인을 이렇게 묘사했다(38쪽). 반(反)흑인성이 노골적인데, 당대의 엘리트인 윤치호는 미국 사회의 흑인 차별을 정당한 일이라고까지 주장했다(41쪽). 여기에는 하루빨리 문명화해야 한다는 절박함, 그러려면 나태함이나 미련함 같은 흑인성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경계심이 깔려 있었다.
수천 년간 다른 인종을 접한 경험 자체가 없던 한국인이 개화기 들어 몇 년 만에 인종주의자가 된 것은, 미국을 근대화의 선생으로 여겼기 때문이다(28~29쪽). 미국이 왜 ‘아름다운 나라[美國]’인지 설명하는 1884년 2월 17일 자 《한성순보》 사설은 숭미주의적 시각을 잘 보여준다(25~26쪽). ‘미제’라는 이유만으로, 인종주의조차 비판 없이 수용했던 것.
이후 근현대사 내내 미국의 대중문화가 대거 유입되며 반흑인성은 인종의 문제에서 피부색의 문제로 확장되었다(127~128쪽). 2019년에는 수단 출신의 이주노동자가 세탁 업체에 채용되었다가 며칠 만에 해고당했다. 해당 업체의 고객사인 어느 호텔에서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이 세탁 업무를 맡는 게 싫다고 항의했기 때문이다(125쪽).
‘흑형’이라는, 얼핏 친절하게 느껴지는 호칭 뒤에는 이러한 반흑인성이 숨어 있다. ‘흑인은 예체능에 강하다’는 편견에 기반하는 데다가, (‘황형’, ‘백형’이 없다는 데서) 유독 흑인만을 ‘구분’ 짓는 표현이기도 하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는 흑형을 ‘모욕형 혐오 표현’으로 규정한다(130쪽). 흑형에 스며든 반흑인성의 오랜 역사를 알게 된 후에도, 이 멸칭을 농담처럼 쓸 수 있을까.

[‘짱깨’_지배당하는 자의 열등감이 촉발한 중국인 혐오]

“조선인은 야만 인종.” “허언함은 조선인의 민족성.” “무능한 망국민.”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은 ‘야만 인종론’, ‘민족성론’, ‘망국민론’을 교육받으며, 식민주의를 내면화했다(50~54쪽). 한국인의 민족주의는 이에 대한 ‘저항 심리’이자, (일본처럼)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다는 ‘모방 심리’로서 탄생했는데(143쪽), 그 대상으로 눈에 띈 것이 중국인이었다.
계기는 1931년 만주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소작농들이 충돌한 ‘완바오산 사건’이었다. 이것이 ‘중국인이 한국인을 핍박한다’는 식으로 와전되어 전해지자, 곧 “갓난아이부터 노인까지 당시 조선에 살던 많은 중국인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하는 유례없는 제노사이드(집단 학살)가 벌어졌다.” 그 결과 200여 명의 중국인이 목숨을 잃었다(148~149쪽).
이후 ‘차이나타운이 없는 유일한 나라’로 불릴 정도로, 한국은 법과 제도를 동원해 체계적으로 중국인을 차별해 왔다. 특히 1948년의 ‘외국인에 대한 출입 규제와 외환 규제 조치’, 1950년의 ‘외국인의 창고 폐쇄령’ 등으로 무역업에 종사하는 화교의 경제력을 뺏는 데 집중했다. 1973년에는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 음식점에 중과세를 적용하거나, 쌀밥을 팔지 못하게 하는 등 촘촘한 규제를 가하기도 했다(150~153쪽). 최근의 조선족 혐오 또한 그들이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논리를 동원한다(154~155쪽).
그러한 역사 속에서 탄생한 멸칭이 ‘짱깨’로, 이는 ‘국민음식’임을 자부하는 짜장면의 별칭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와 수천 년간 관계 맺은 이웃 민족(중국인)이자, 심지어 동포(조선족)인데도 차별하는 이중성을 잘 반영한다. 인종적으로 차이가 없고 역사를 공유하지만, 민족적·문화적 차이와 상충하는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는 것. 이는 ‘인종 없는 인종주의’라는 한국식 인종주의의 또 다른 특징이다.

[‘튀기’_한국판 피 한 방울 법칙]

“우리 핏속에 잠복하여 있는 불순한 혼혈을 뽑아내자.” 혼혈인은 1949년 2월 12일 자 《경향신문》 기사처럼 매우 박한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전혀 환영받지 못할뿐더러, ‘열등한 유전자’라거나 ‘부도덕한 문화의 결과’라는 등 온갖 비난에 시달렸다(160~163쪽).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혼혈인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다만 1950년대를 전후로 등장한 혼혈인은 (주로 주한미군인) 흑인이나 백인을 아버지로 두었기에 피부색이나 외모에서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리고 이는 ‘피’에 대한 한국인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인종마다 피의 성분이 다르고, 이것으로 진화 정도를 알 수 있다는 ‘인종계수 연구’에 천착했다(54~56쪽). 비슷한 시기에 미국은 ‘피 한 방울 법칙’이라 하여, 조상 중에 유색인종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백인이 아니라는 법을 명문화했다(178~180쪽). 이를 근거로 한 흑백 분리는 주한미군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이를 직접 경험하거나, 가까이서 본 한국인은 자연스레 ‘피가 섞이면 안 된다’는 순혈주의를 품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전쟁 탓에 한국인은 반공주의, 즉 ‘내부의 적’을 솎아내는 일에 숙련되었다. 이는 생존의 문제였으니, 실제로 이승만 정권은 강박에 가까운 태도로 혼혈인의 해외 입양을 추진했고, 이후에는 전세기를 동원해 대거 ‘수출’하기까지 했다(163~164쪽).
‘종이 다른 두 동물 사이에서 난 새끼’라는 뜻의 ‘튀기’에는 이처럼 극단적 배제의 역사가 녹아 있다. 해외로 입양된 혼혈인이 잘 살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들을 보면, 당시 한국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듯싶다(165~167쪽). 그런데도 혼혈인 혐오가 오늘날 다문화 가족 혐오, 결혼 이주자 혐오 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피 한 방울의 다름조차 인정하지 않는 한국식 인종주의의 특징이 엿보인다.

[‘똥남아’_경제력으로 가른 인종의 귀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경제성장기인 1968년 반포된 〈국민교육헌장〉의 일부다. ‘민족중흥’, ‘국가 건설’ 등의 표현이 암시하듯, 당시 발전주의는 단 한 명도 빠짐 없이 투입되어야 할 국시(國是)였다(89~91쪽). 뒤이어 세계화 시대의 막을 연 1993년의 대통령 취임사는 “도약하지 않으면 낙오할 것”이라며, 경제성장을 민족 간 경쟁의 차원에서 바라보았다. 이로써 타민족은 무조건 밟고 올라설 대상이 되었다(96~98쪽).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가장 멸시당한 존재가 바로 동남아시아인이다. 한국에서 그들은 가난한 나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대당하고, 또 ‘외노자(외국인 노동자)’로 불린다. 이 멸칭에는 “가난하면 문화적으로도 미개하고, 인지적으로도 열등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즉 경제력을 혐오의 근거로 삼는 한국식 인종주의의 특징이 녹아 있다. 가령 한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백인 교수는 외노자라 하지 않지만(186쪽), 반대로 인도인 교수는 어색해하는 식이다(138쪽). 2019년에는 한국에서 9년째 유학 중인 미얀마인이 동남아시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불법 체류자 추방하라”라는 막말을 들어야 했다(189~190쪽).
비슷한 멸칭으로 ‘똥남아’가 있다. 가난한 동남아시아인은 더럽기까지 하다는 뜻으로, 차별의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베트남 현지에서 유행하는 한국어 교재 내용을 보면 “함부로 때리면 안 돼요” 등의 표현이 담겨 있다. 경제력으로 인종의 귀천을 가르는 한국식 인종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비슷한 내용의 한국어 교재가 더욱 많아질 것이다(198~199쪽).

[‘개슬람’_이유 없는 혐오]

“모든 테러 분자는 이슬람이다.” 대구에서는 2020년부터 모스크 건축을 둘러싸고 지역 무슬림과 주민 간에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데, 공사장 근처에 내걸린 현수막 속 문구다. 이처럼 우리는 “이슬람은 곧 사악하고 폭력적인 종교를, 무슬림은 곧 테러리스트를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연상 작용”에 익숙하다(208~210쪽).
사실 무슬림은 우리에게 낯선 존재다. 경제적이든 종교적이든, 충돌이든 협력이든 역사상 교류한 일 자체가 많지 않다. 그런데도 막연한 혐오를 품는 데는 “미국 대중매체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1994년 작 〈트루 라이즈〉부터 2016년 작 〈런던 해즈 폴른〉까지, 저자는 기독교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묘사한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살피며, 우리의 무슬림 혐오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추적한다(204~205쪽).
개화기에 서구 열강에서 무비판적으로 인종주의를 받아들였듯이, 오늘날 우리는 무슬림 혐오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 맹목적 혐오는 정치적 탄압을 피해 한국에 온 난민조차 예외로 두지 않는다. 2018년 조국 예멘의 내전을 피해 500여 명의 난민이 제주도를 찾았다. 곧 수많은 언론 매체가 “1인당 138만 원을 가져간다”, “난민으로 위장한 테러리스트다” 같은 확인되지 않은 소식을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는 대중의 ‘이슬라모포비아’를 한껏 자극했다. 물론 이는 이후 대부분 가짜 뉴스로 밝혀졌다(211쪽).
그러한 혐오와 차별을 뿜어내는 멸칭으로 ‘개슬람’이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은 “조선인 머리는 개와 다르지 않다”라며 한국인을 멸시했다. 그때 당한 차별과 모욕을 반세기가 지나 무슬림에게 그대로 퍼붓고 있는 것이다(53쪽). 모르면 알고자 하는 대신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것. 이것이 가장 최신의 한국식 인종주의다.

K의 시대,
그 이후를 그리다

바야흐로 ‘K’의 시대다. 〈오징어 게임〉부터 BTS까지, 한국(Korea)에서 만든 것, 또는 한국인이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마치 라벨을 붙이듯 온갖 것에 ‘K’를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made in Korea’가 경쟁력인 시대가 된 셈이다(105~106쪽).
일제강점기 이후 지배당한 수모를 떨쳐내기 위해 한국인은 경제성장에 집착했다. 이 역사적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인은 똘똘 뭉쳐야 했고, 그 과정에서 다른 생각, 다른 존재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렇다면 경제 규모 세계 10위에 오른 오늘날, 과연 우리는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한국은 오히려 우월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이때 핵심은 “다양한 문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내 것을 자랑하기에 바쁘다. 유튜브를 가득 채운 ‘국뽕’ 콘텐츠가 대표적인 예다(107쪽).
한국식 인종주의는 피부색과 민족, 경제력과 신앙 등 다양한 차별 기재를 능숙하게, 또 섬세하게 다룬다. 지난 150년의 근현대사를 지나며 이는 ‘마음의 습관’이라 할 정도로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143~144쪽). 저자는 이를 ‘혐오의 회로판’이라고 설명하는데, 어떤 상황에서든 그에 ‘알맞은’ 인종주의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66, 209쪽).
이처럼 뿌리 깊은 한국식 인종주의의 역사를 뛰어넘기 위해 저자는 ‘시민적 민족주의’를 제시한다. 혈통이나 문화적 유사성, 경제력 등을 기준으로 ‘순수한’ 한국인을 골라낸다면, 과연 몇 명이나 해당될까. 그보다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며 역사와 경험을 공유하는 일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즉 “정말로 우리는 모두 다 사람”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명제에서 인종주의 논의는 시작되어야 한다.

QUICKSERVIC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