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

저자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신해경 옮김
출판사
엘리
출판일
2022-08-24
등록일
2023-02-01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23MB
공급사
알라딘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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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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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그는 우리를 속였다. 정말 제대로 속였다.”
삶 자체가 SF였던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1970년대 미국에서 “가장 남성적인 SF를 쓰는 남자”, 작품에 “지울 수 없이 남성적인 지점들이” 포진한 작가. 모두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를 따라다니던 수식어였다. ‘제임스’나 ‘주니어’라는 이름은 물론, 작품의 문체와 소재, 여성 등장인물을 향한 성적 욕망, 저자의 이력으로 읽히는 소설 속 군대와 CIA 이야기가 팁트리는 남성이라는 점을 명백히 증명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슐러 K. 르 귄이 썼듯, “그는 우리를 속였다. 정말 제대로 속였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이 51세의 나이에 본격적으로 SF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고안한 필명이었다. 군대와 CIA에서 정보원으로 일하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원치 않은 주목을 받았던 저자는 글에서만큼은 ‘여성 SF 작가’로서 받게 될 관심에서 벗어나고자 남성처럼 보이는 필명을 사용했다. 그 후 10년 동안 얼굴을 보이는 일 없이 작품과 편지로만 소통해오다 1977년, 팁트리가 61세의 여성 작가임이 밝혀진다. SF 소설계에 일대 파문이 일었고, ‘팁트리 쇼크’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후대는 이 사건을 “별이 폭발했다”라고 기록한다.
그래서 폭발한 건 어느 별이었나. 르 귄은 모두를 속인 팁트리에게 “우리는 고마워할 수밖에 없다”라고 적는다. ‘팁트리 쇼크’는 곧 ‘남성적 글쓰기’와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무너뜨린 교란 사건이었고, 여태 어떠한 전통과 편견 속에서 SF를, 문학을 읽어왔는지 검토할 주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고 여전히 우뚝 선 것이 있으니, 거짓이 아닌 저자의 이력, 실로 ‘진짜’인 그의 이야기들이다. 군대, 정보국, 오지의 정글, 아프리카 대륙 등 앨리스가 살아온 시간은 곧 팁트리의 삶이기도 했다. 앨리스로서, 그리고 팁트리로서 저자의 과거와 소망들이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의 다채로운 소설들 속에 그대로 담겨 있다.
소설집의 문을 여는 「눈은 녹고, 눈은 사라지고」의 배경은 먼 미래, 벌레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는 황폐화된 에티오피아다. 두 팔이 없는 여자애와 뇌병변 장애를 지닌 늑대가 건장한 Y염색체-남성을 납치하려 강을 건너고 산맥을 타는 이 아련한 활극에는, 부모님과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보낸 팁트리의 유년 시절이 녹아 있다. 미국의 유명 SF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 〈스타 트렉〉을 보며 자란 「빔 어스 홈」의 공군 조종사 ‘호비’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드라마 속 인물들이 자신을 데리러 오리라 믿으며, 주둔지를 습격당한 와중에 그들을 만나러 비행기를 타고 우주로 솟구친다. 호비는 군 정보원으로 활동한 저자의 이력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조종사가 되기를 꿈꾸었던 과거 팁트리의 소망이 담긴 인물이다.

“우리가 딱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들이 착륙하기 전까지는.”
우주적 상상력을 통해 바라본 지구 사회, 유쾌한 유비와 전복


팁트리는 언제나 경험에 근거해 이야기를 직조해나갔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단지 땅 위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평의 땅을 딛고, 우주를 향해 수직으로 솟은 저자의 상상력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지구식 성간 계몽운동을 설파하러 낙후된 행성으로 홀로 여행해 각종 농경·산업 기술을 전하는 지구인 소년 캐멀링의 자아도취 문물 전파 이야기(「수영장이 비면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인 연인의 죽음을 막으러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룰리의 가슴 아픈 시간도약(「허드슨베이 담요로 가는 영원」). 내장을 불태우는 공기, 눈알을 꼬챙이로 찌르는 듯한 하늘빛, 손을 난도질하는 듯한 자갈, 그럼에도 끝내 돌아온 고향 행성 지구에 남기로 한 무통無痛의 존재(「고통에 밝은」). 행성계를 넘나들고 과거와 미래를 자유로이 오가는 팁트리의 상상력은 때로는 세계사를 참조해 식민주의와 계몽주의를 유비하기도 하고, 때로는 개인의 사랑과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며 보다 내밀하고 철학적인 주제로 나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단편보다도 팁트리의 통쾌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소설은 「엄마가 왔다」이다. 인류의 첫 외계인 조우 사건을 그린 이 소설은 지구인 남성보다 키가 반절씩은 큰 카펠라인 여성들이 달에 착륙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로, 지구의 남성지배 구조를 전복한 유쾌한 수작이다. 강인한 육체의 여성 거인 앞에서 지구인 남성은 반격도 못 하고 그저 장난감으로 놀리다 버려질 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성별에 근거한 권력 구조를 위아래로 뒤집었다는 데 있지 않다. 카페라인들을 지구에서 몰아내기 위해 주인공들이 내놓은 방안은 곧 남성지배 구조에서 지구인 여성 틸리가 겪은 과거의 ‘상처’를 재상연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이는 ‘상처’란 영원히 상처로만 남지 않고 (무척이나 고통스럽지만) 어떻든 다른 방식으로 활용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틸리가 자신과 똑같은 상처를 겪은 FBI 동료이자 지구인 남성 맥스에게 “다 상대적인 거야, 그렇지 않아?”라고 묻는 건, 그렇기에 삶을 지속해보겠다는 옅은 다짐과 애착으로 읽힌다.

“아픔을 계속 간직하며 살든가, 아니면 아픔을 잊고
얼마 후에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든가, 둘 중 하나였다.”
평범하나 특별하고, 외로우나 담대한 존재들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의 다채로운 열세 편의 단편을 읽어나가며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근원적인 외로움에 휩싸여 있다는 점이다. 언제나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 떨어진 이 존재들은 우주에 집이라 부를 만한 곳이 있을지 부러 의심하기도 하지만, 그건 그만큼 집이라는 고향과 뿌리를 소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테라여, 그대를 따르리라, 우리의 방식으로」에는 제 손으로 고향 행성을 망가트린 지구인의 후손 솔테라인들이 등장한다(‘솔’은 태양, ‘테라’는 지구를 뜻한다). 온갖 행성 출신의 동물과 인간들이 모여 한바탕 경주를 뛰는 ‘레이스월드’를 세우고, 모든 경기와 베팅 시스템을 공정하고 청렴하게 운영하는 것이 솔테라인들의 자랑이자 존재 이유다. 먼 과거 스스로 고향을 불태운 조상들이 후대를 위해 남긴, 그리고 그를 받들어 계속해서 미래로 잇는, ‘고아’가 된 지구인 후손들의 가늘지만 단단한 꿈이다. 고향은 아니지만 분명 돌아갈 집인 레이스월드는 솔테라인을 비롯해 고아가 된 모든 종족의 꿈이기도 하다.
더불어, 실패할 뿐이지만 계속해서 인간으로 변신해 타인과 관계를 맺고 ‘구조’를 공유하기를 시도하는 고독한 외계 존재(「난 너무 크지만 노는 게 좋아」), 음악 취향, 외모, 추구하는 가치 등 모든 것이 먼 과거에 머물러 있으며 홀로 여전히 첫 우주탐사의 영웅들을 기억하는 ‘우주안전감독관 골렘’(「다이아몬드 가득한 하늘에 계신 어머니」)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겪고, 또 겪어나갈 외로움이라는 보통의 정서를 속도감 있는 SF 서사 속에 짙은 농도로 녹여두었다.
그럼에도 팁트리의 우주 속 존재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시간과 삶을 지속한다. 그것이 반세기를 지나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고, 우리의 마음에 닿는 지점이기도 하다.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이라는 51세의 여성이 글을 쓰기에 앞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라는 남성적 필명을 둘러쓴 것 또한, 어떠한 결연함이나 묵직한 다짐보다도 자신만의 독창적 SF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와 서사를 직조해내고 (외부로부터의 불필요한 방해 없이) 글쓰기를 계속하겠다는, 가볍지만 진실된 마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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