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기후에 대한 조선의 도전, 측우기

기후에 대한 조선의 도전, 측우기

저자
이하상
출판사
소와당
출판일
2011-11-23
등록일
2012-11-16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10MB
공급사
웅진OPMS
지원기기
PC 프로그램 수동설치 뷰어프로그램 설치 안내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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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 기획의도
기후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일은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각종 기후 데이터가 축적된 현재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예측하지 못한 기상 이변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므로 더욱 절실한 문제이다. 여러 기상 이변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아시아 몬순 기후의 특성상 봄 가뭄과 여름철 집중 호우, 태풍을 예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농업 국가 조선에서는 기후 예측의 절실함이 지금보다 훨씬 컸다. 조선의 농업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벼농사가 기본이었는데 벼는 제때에 충분한 양의 물을 공급해주는 일에 1년 농사의 성패가 달려 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비가 제때에 내려주는 것이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었다.
그러나 현재에도 비를 원하는 때에 내리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비가 절실했던 조선에서는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제때에 비가 내리기를 빌기만 했을까? 조선의 왕들은 기우제를 지내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까?
이 책은 조선의 농업이 기후의 한계에 어떻게 도전했는지, 조선의 왕과 행정 시스템은 국가의 존속을 위해 어떻게 기후를 예측, 대비하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는지 살펴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그 출발은 조선 농업의 전환기에 나타나 200년의 기록을 축적한 측우기이다.
2. 주요 내용
1장. 와다 유지를 만나다
1910년, 경술국치. 국가 행정체계가 무너진 그 시절, 조선에 들어온 일본의 기상학자 와다 유지가 조선의 측우기록을 발견, 그 기록의 수집과 정리를 시도한다. 붕괴 직전의 조선 속에서, 일본인 와다 유지는 조선의 측우기와 측우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2장. 측우기의 전야
기상의 불안정, 그중 특히 가뭄이 왕의 책임이었던 조선시대. 이앙법의 확산, 불안정한 기후, 그보다 더 불안정한 왕권, 이 세 가지 요인이 조선 왕들을 변화시키다. 기우제에 기대어 나라를 통치하던 시대, 일풍일우(一風一雨)를 살피게 한 측우기는 하늘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3장. 측우제도의 창설과 재건
젖은 땅을 파헤쳐 비를 재는 방법에서, 측우제도를 전국에 배포하기까지, 수많은 착오와 과정을 거친 조선의 측우기와 측우제도가 어느 날 돌연 기록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렇게 홀연히 사라진 조선의 측우제도가 어떻게 다시 조선에 나타나게 되었는가.
4장. 수표와 풍기의 실체
측우기와 같이 기후를 읽었던 조선의 발명품이 또 있다. 바람을 읽는 깃발 ‘풍기’, 하천의 수위를 읽는 돌 ‘수표’. ‘하늘을 지배하는 자, 세상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4장에서는 하늘을 지배하고픈 조선의 열망이 담긴 두 발명품에 대해 알아본다.
5장. 강우량 관측 규정과 측우제도의 운영
우량이 한 국가의 생존을 좌우한 만큼, 조선의 기상청인 관상감(서운관)은 그 책임이 막중했다. 우량이나 비가 온 시각을 잘못 기록한 관리들은 곤장, 감봉 등 무거운 형벌을 받곤 했다. 한 국가의 존속을 좌지우지한 조선의 핵심 기관인 서운관과 그 기록에 대해 알아본다.
6장. 측우기록의 현존 상황과 그 의미
1910년, 경술국치로 관상감이 폐지되던 해, 조선총독부 관측소에 근무하던 와다 유지가 옛 관상감 창고에서 조선의 측우기록을 만난다. 이 장에서는 와다 유지가 정리한 측우기의 우량 측정치와 신식 통계의 차이를 통해 측우기의 과학성을 밝힌다.
7장. 측우기는 우리에게 어떤 것일까
측우기는 세종대왕이 만들었을까? 측우기는 세계 최초의 우량 관측기일까? 측우기의 입지름과 그 길이 1센티미터 안에도 과학적 원리가 숨겨져 있다? 측우기를 둘러싼 모든 비밀을 이 장에서 풀어 본다.

3. 흥미로운 대목들
왕의 권력이 강우에서 비롯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도 우리 농업에 있어 벼는 가장 중요한 작물이었다. 봄 가뭄은 동아시아 몬순 지역의 농업국가인 우리 땅에서 피하지 못할 숙명이다. 고대에 있어 기상의 불안정, 특히 가뭄은 왕의 책임이었다. “강우와 가뭄이 순조롭지 않아 오곡이 제대로 익지 않으면[水旱不調, 五穀不熟] 그 죄를 물어 왕을 바꾸거나 죽여야” 할 정도였다. 한발은 곧 왕권교체로까지 연결되던 최대의 정치쟁점이었다.(2장)
측우기 이전에도 조선은 비를 측량했다
측우기 이전에는 땅에 비가 얼마나 스며들었는지를 조사하여 강우량을 측정하였다. 비가 흠뻑 와서 고여 있으면 눈으로도 파악이 될 것이지만, 가뭄 끝에 비가 와서 메마른 토양에 스며들었으면 물이 스며든 깊이를 조사하였다. 이 조사가 손가락으로 흙을 찔러본 것인지, 아니면 어떤 특수한 기구를 사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젖은 토양을 호미와 같은 농기구로 눌러보아 딱딱한 마른 부분까지의 깊이를 살펴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3장)
하늘을 읽지 못한 자를 벌하다
정조 21년(1791) 겨울에 우수(雨水)의 절후를 잘못 계산해 당시 관상감 고준관(考准官)이었던 성주덕도 감인관(監印官) 최광빈(崔光賓), 최경렬(崔景烈)과 함께 벌을 받았다. 최경렬은 곤장 80대를 맞은 후 평창으로 유배를 당했고, 양주현에 살던 최광빈은 양주목사로부터 처벌을 받았다. 성주덕도 형주에 이송되었으나, 수속(收贖)으로 장형(杖刑)과 유배를 면제받았다. 책임자였던 관상감 제조는 1등(等)의 감봉처분을 받았다. 즉, 녹봉의 10분의 1을 감봉 받은 것이다. 이만큼 관상감 업무는 정확히 시행되어야 했고, 이를 어기면 징벌이 엄격하였다.(5장)
표본 측량 오차 0.51%의 비밀
측우기의 깊이는 30센티미터 전후이다. 아무리 비가 많이 오더라도 짧은 시간에 30센티미터를 넘길 수 없지만 측우기의 깊이가 너무 얕을 경우 빗방울이 밖으로 튀어 나가거나 밖에 떨어진 빗방울이 안으로 튕겨 들어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이런 긴 원통으로 되어 있으면 밑바닥에 자를 넣어 고인 빗물을 재기가 힘들다. 이에 금영측우기는 본체를 세 부분으로 분리해 측우기 밑바닥에 고인 빗물을 쉽게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지상에 놓인 측우대 역시 빗물이 땅에서 튀어 측우기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해 준다.(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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