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 이상(李箱)!
이상은 1930년대 후반에 세계적으로 유행한 자의식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며, 우리나라 최초로 심리주의적인 수법으로 자의식의 세계를 묘사했다.
그는 독특한 위트와 패러독스로 근대적 자의 의식을 강렬하게 옹립하고 나섰으며, 그의 자의식의 특이한 점은 작중 인물 등이 자의식의 실의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그는 심리주의 기법에 의해 내면세계를 다룬 초현실주의 기법과 심리주의 경향의 난해한 실험적인 작품을 썼는데, 이와 같은 경향은 시와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 땅의 대표적인 자의식의 작가이며, 초현실주의의 시인으로 그는 우리 문학사상 가장 이채로운 존재로 평가된다.
저자소개
현대시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며, 1930년대에 있었던 20년대의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반발한 모더니즘 운동의 기수였다. 그는 건축가로 일하다가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로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겉으로는 서울 중인 계층 출신으로 총독부 기사였던 평범한 사람이지만, 20세부터 죽을 때까지 폐병으로 인한 각혈과 지속적인 자살충동 등 평생을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애 했던 기이한 작가였다. 한국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시와 소설을 창작한 바탕에는 이런 공포가 늘 그의 삶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10년에 태어나 1912년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집에 장손으로 입양되었고,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마쳤다. 손가락이 잘리고 빈궁하게 살았던 친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와 자신을 입양한 백부에 대한 증오심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영민하여 학업 성적은 우수하였고,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질이 있어 학창시절, 직장시절 내내 그림에 꿈을 품고 열중하였다. 또한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이 있었고, 예술적 이상향으로 동경(도쿄)을 꼽았다고 한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현재 서울대학교) 재학 중 학생 회람지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하면서 시를 발표했고, 1928년 졸업 앨범에서 평생 동안 필명이 되는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어 근무하던 중 12월에 건축학회지 《조선과건축》의 표지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된다.
스스로를 선각자이며, 천재, 모더니즘의 기수이자 전위예술의 선구자라고 자처했는데, 식민지 시대임에도 민족적인 자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범세계적이고 현대적인 문명에 심취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한국 고유의 색채를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유럽이나 일본 문학계에 유행하던 모더니즘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실제 생활은 나태하고 난잡, 무기력했다고 전해지며,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잡지《조선(朝鮮)》의 1930년 2월호부터 12월호까지 9회에 걸쳐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기도 한 『12월12일(十二月十二日)』을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하였고, 1931년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BOITEUX·BOITEUSE', '오감도'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였다. 이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고,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다. 미친수작, 정신병자의 잡문이라는 혹평을 받아 결국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수정하여 연재가 중단되었지만 열화와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소설 「지팡이 역사」, 수필 「혈서삼태」와 「산책의 가을」 등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연재되는 동안 삽화를 맡아 그리기도 하는 등 창작 활동은 계속하였다.
친구인 구본웅(具本雄)과는 신명(新明)학교 동기동창일때부터 각별히 친했으며, 대학입학시 그가 선물한 스케치박스(사구상)에서 필명인 이상이 나왔다는 설이 전해진다. 화가 구본웅이 인쇄소 창문사에 이상의 일자리를 주선하여 근무하면서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인 《시와소설》을 창간하고 편집해 발간하지만 1집만을 발간하고 그만둔다. 이후 <중앙>에 '지주회시', <조광>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다.
백부에게서 유산을 물려받고 가족들과 함께 살았으나, 가족들의 무지와 가난에 곧 질려서 보름만에 나와버렸다. 1933년, 무질서한 생활로 폐병이 심해져 각혈까지 한 그는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구본웅과 함께 황해도 백천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그 곳에서 그의 연인인 금홍을 만났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금홍을 못잊고 방황 하다가 '제비'다방을 마련해 그녀를 마담자리에 앉혔다. 그는 금홍과의 만남 이후에도 여러 여급들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이들을 무척 사랑하긴 했지만 그 행복이 오래간 적은 없었다. 다만 이들과의 관계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어 작품들을 집필하였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금홍과 권순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가면 '봉별기', '날개', '지주회시', 그리고 '종생기'등과 전문시 음화시, 문명 비평류의 수필 등을 산더미처럼 쏟아내었다. 이 수많은 작품들이 술에 절어있던 한밤 중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천재 이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그러던 그는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이자 친구 구본웅의 이복동생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순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씨)과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금홍과 달리 빈민굴에서 고생하는 그의 가족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그녀는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하게 되었다. 건강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비참한 현실과 마주친 이상은 도피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탓인지, 가족과 아내를 남겨둔 채 1936년에 동경행을 선택했다. 동경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가난을 절절히 겪던 그는 '종생기', '환상기', '실락원', '실화', '동경'등의 수많은 작품을 엮어냈고, '봉별기'를 <여성>에 발표하였다. 그의 마지막 여자인 변동림은 '동해', '단발', 구필 '행복', '종생기'의 '선', '실화'의 '연' 등에서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
이듬해 2월, 극도로 악화된 건강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상은 1937년 불량선인(사상불온) 혐의로 운 나쁘게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옥살이를 치렀다.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시체나 다름없게 된 그는 보석을 허가받아 평소 동경제대의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항상 여자와 문학에 빠져 살던 이상은 결국 날지 못한 채 변동림이 구해온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20세기 한국문학사에 내장된 최고의 형이상학적 스캔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집이 출간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