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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랭킹 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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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랭킹 캣

저자
시게마쓰 기요시 저/김미림 역
출판사
arte(아르테)
출판일
2018-04-06
등록일
2019-02-19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33MB
공급사
YES24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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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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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당신만을 위한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
나오키 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수상작가
NHK드라마 〈블랭킷 캣〉 원작 소설




◎ 도서 소개

“당신만을 위한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
나오키 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수상작가
NHK드라마 〈블랭킷 캣〉 원작 소설

『블랭킷 캣』은 대여 고양이를 빌린 사람들이 2박 3일간 고양이와 함께하며 겪는 성장통을 다룬 7편의 작품이 담긴 시게마쓰 기요시의 옴니버스 단편소설집이다. 2017년 일본에서 NHK에서 동명의 7부작 드라마로 제작되어 최고 시청률 8.4%에 달하며 출연배우와 고양이 모두 인기를 끌었다.
시게마쓰 기요시는 나오키 상(『비타민F』),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십자가』), 야마모토 슈고로 상(『소년, 세상을 만나다』), 쓰보타 조지 문학상(『나이프』)까지 유수의 문학상을 석권한 일본의 중견 작가이다. 소외된 어른과 청소년들을 등장시켜 집단 따돌림 등 청소년 문제와 현대사회의 가족 문제,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심한 심리 묘사와 담담한 필체로 다루고 있다. 마이니치신문 청소년 상담 코너의 카운슬러로도 활동한 시게마쓰 기요시는 이지메 전문 작가이기도 하며 그의 작품은 대중성과 작품성을 고루 갖추었다 평가받고 있다.

“당신에게도 마음속 ‘담요’가 있습니까?”
오색찬란 일곱 마리 고양이의 묘(描)한 힐링!

*블랭킷 캣 대여 규칙*
하나, 기간은 2박 3일. 구입 불가.
둘, 낯선 곳에서도 잠들 수 있게 해주는 담요는
절대 버리거나 세탁하지 말 것.

아이가 없으니 생활이 지나치게 ‘청결’하기만 해서 고양이를 키울까 고민 중인 40대 부부, 30년 일했던 회사의 공금을 횡령하고 고양이와 도피행에 나선 독신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처지이지만 여자친구와 함께 고양이만은 키우고 싶은 ‘N포 세대’ 청년, 치매 앓는 할머니에게 옛 고양이와 닮은 고양이로 눈속임해보고 싶은 가족……. 그들에게 주어진 단 사흘, 영리하고 신비한 대여 고양이는 답이 되어줄 수 있을까?

오늘도 먼지처럼 살아낸 어른아이들의 성장통
소외된 이들을 보듬는 시게마쓰 기요시의 따뜻한 위로

『블랭킷 캣』에서 고양이가 어디서든 잘 수 있는 것은 새끼 시절부터 함께한 담요가 있기 때문이며, 고양이를 빌린 사람들은 각자의 담요, 즉 자신 안의 부드러운 부분과 강한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작가는 학교폭력, 노인문제, N포 세대, 정리해고와 실업난, 불임 등 현대인들이 살면서 한 번은 맞닥뜨리는 문제를 ‘대여 고양이의 담요’와 엮어 보편적이면서도 강력한 공감을 이끌어냈다. 사흘 동안 문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솔직한 질문과 현실 직시에 다다르는 이야기가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진다.
또한 완벽하지 않은 인물, 도덕적으로 결함 있는 인물도 단죄하지 않고 화해와 포용을 모색하는 작가 시게마쓰 기요시의 진면모가 이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공금을 횡령한 다에코는 반복된 결혼생활 실패로 좌절한 데다 암까지 선고받은 여자고, 왕따의 가해자로 지목된 고지는 아버지의 터무니없는 기대로 힘겨워했다. 정리해고당한 아버지가 집을 팔기 전 아들딸에게 추억을 만들어주려고, 가족들이 치매 걸린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처럼 각자 자기만족을 위해 고양이를 빌리는 인물들은 나약하지만 선량한 소시민들의 표본이다.
『블랭킷 캣』은 고양이를 전면에 내세운 듯 보이지만 사실 고양이와 살아가는 ‘사람’의 치유와 성장이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고양이를 키워본 적 없는 사람이든, 7편의 단편에서 때론 잔잔하고 때론 강렬한 여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책 속에서

기본적인 계약 기간은 사흘이다. 2박 3일.
“좀 짧은 것 같은데요.”
막 계약을 끝낸 손님에게 점장은 늘 이렇게 말한다. 말투도 표정도 밑그림을 그리듯이 정확하게 반복한다.
“사흘 이상 손님과 같이 지내면 정들어버려요. 그럼 고양이는 이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해서 불안해하죠. 그건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매는 불가능하다. 같은 고양이를 빌리는 것도 안 된다. 원칙적으로는 1개월 이상의 간격을 두지 않으면 접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대여만 가능합니다.”
규정을 다시 확인시킬 때의 조용하지만 딱딱한 목소리도 똑같다. 비용은 결코 싸지 않다. 사흘간의 대여료와 그 대여료의 몇 배나 되는 보증금. 전부 더하면 점장의 본업인 애완동물 대여점에서 순혈종의 새끼 고양이를 충분히 사고도 남는 금액이다.
그럼에도 고양이 대여 신청이 끊이질 않는다. 일곱 마리의 고양이들 모두 빌려간 곳에서 우리 안으로 돌아오고 하룻밤이나 이틀 밤만 지나면, 다시 새로운 집으로 향한다. 사흘 한정이긴 하지만.
빌릴 때는 화장실과 사료가 딸려간다. 애완동물 대여점에서 준비한 사료 외에는 먹이지 말 것. 특히 양파, 전복, 뼈가 붙은 닭고기는 절대 먹여서는 안 된다고 점장은 강조한다.
“양파는 고양이의 혈액에 치명적인 독성을 일으킵니다. 적혈구가 파괴되어 빈혈을 초래할 수 있어요. 전복을 먹으면 귀가 새빨갛게 부어버리고요. 심한 경우 피부염으로 발전해서 그대로 두면 그 부분이 떨어져 나갈 수 있죠. 닭뼈는 씹어서 부수면 세로로 갈라지거든요. 뾰족해진 닭뼈가 목이나 내장을 찌르면 큰일 나니까요.”
메모를 하는 손님, 놀란 얼굴로 맞장구를 치는 손님,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 손님,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며 흘려듣는 손님…….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즉 손님에 따라 고양이를 키운 경험이 완전히 다르다는 얘기다.
처음 고양이를 키우는 손님에게도 점장은 망설임 없이 고양이를 빌려준다. 대신 조금 강한 어조로 못을 박는다.
“고양이와 함께 자는 건 안 됩니다. 잘 때는 꼭 이 바구니에 넣어야 하고, 바구니 안의 담요도 이 상태 그대로 깔아줘야 합니다. 더럽다고 절대 세탁하시면 안 되고요.”
고양이는 환경의 변화를 싫어한다. 대여가 반복되면 보통 고양이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서…….”
점장은 정해진 대사를 정해진 표정과 목소리로 입에 담는다. 설명을 시작하고 이 이야기를 꺼내기까지의 시간도 어쩌면 늘 정확하게 똑같을지도 모른다.
“이 담요예요.”
일곱 마리의 고양이는 태어날 때부터 줄곧 저마다 여러 장의 담요를 차례대로 사용하며 잠들었다. 새끼였을 때부터 애용한 담요만 있다면 어디서든 푹 잠들 수 있다.
“그, 왜 옛날 만화에 자주 나오죠. 여행 갈 때 자기 집 베개를 가방에 넣어간다는 얘기. 그거랑 같은 거예요.”
하하, 하고 웃는 모습도 평소와 다름없다. 지금도 그렇다.
“자, 그럼 규칙은 확실하게 전달해드렸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귀여워해주세요.”
-꽃가루 알레르기 블랭킷 캣

정확히 말하면 도둑질은 아니다.
다에코가 저지른 범죄는 횡령이었다. 30년 동안 근무한 문구 도매 회사 운용 자금 3천만 엔 정도.
‘가족적’이라는 말이 정말 딱 들어맞는 작은 회사였다. 무리한 확장은 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발전하려는 자세를 버린 것도 아닌 회사. 이 시대 대부분의 회사들처럼 타성에 젖지 않았다. 결코 경영이 쉽지는 않았지만 견실하게 대기업이 아직 칠하지 않은 부분을 찾아내서 가느다란 붓으로 칠하던 그런 회사였다.
다에코는 사장의 신뢰를 받았다. 지금 사장의 부친인 선대 사장부터 사장의 아들인 전무까지도 ‘다에코 씨, 다에코 씨’라고 이름으로 불렀고, 다에코가 관리하는 장부는 다시 확인하는 법이 없었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야.”
조수석의 구로에게 말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훈훈극장』처럼 좋은 사람만 있었어.”
이렇게 덧붙이며 시속 120킬로미터 가까이 속도를 더 높였다.
사장 일가의 성품에 어울리게 종업원도 모두 느긋했다. 물론 30년이나 일하다 보면 충돌 한두 번쯤은 생기게 마련이다. 성격이 꼬인 사람이나 덜렁대는 사람, 묘하게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도 나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나버린 지금 돌아보면 ‘다들 좋은 사람이었는데’ 하고 어렴풋이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몇 년 뒤면 무사히 정년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어렸을 때부터 ‘다 아줌마, 다 아줌마’ 하면서 따르던 전무의 아들도 입사하고, 사장에게 ‘정년 후에도 고문으로 일을 계속해줬으면 좋겠다’라는 말도 들었다.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지금도 없다.
앞으로도 회사를 떠올릴 때 싫다는 느낌이 드는 일은 아마도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없겠지.
“너무하네.”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다가 추월 차선을 달리던 승용차가 깜빡이는 전조등 불빛을 정면으로 받았다. ‘아이가 타고 있어요’라는 금속판을 뒷면 유리에 달고 있는 차는 당황하며 왼쪽 주행 차선 쪽으로 달아났다. 황급히 차선을 바꾸는 모습이 흐앗, 하고 짧은 비명을 지르고 목을 움츠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메르세데스 벤츠 S클래스의 위엄이랄까, 위광이랄까, 압박이랄까, 위압감을 실감한다.
외제차를 동경했지만, 결국 크라운 정지 사고에 목숨을 잃은 사장이 문득 떠올랐다. 회사용 차를 조금 무리해서 세르시오로 구입했을 때 지금의 사장이 기뻐하던 미소도 떠오른다.
3천만 엔.
이자 놀음으로 불리거나, 토지를 굴려서 모은 돈은 아니었다. 사장부터 평사원까지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신발 깔창이 닳고 닳도록 뛰고, 접대 자리에서는 자존심을 꽤나 버려가며 조금씩 모은 자금이다. 경영이 어려울 때는 잔고가 줄고, 회복되면 는다. 잔고는 회사 사정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그걸 모두 빼앗아버렸다.
“너무하네, 정말…….”
-조수석에 앉은 블랭킷 캣

5월의 중순쯤, 당번인 야마슈가 교무실에 간 사이에 이다가 물었다.
“야마슈 말이야, 고지랑 친해?”
“너희, 호모야?”
야나세도 고지를 비웃었다. 그리고 스즈키는 ‘검은 수염의 위기일발’통에 칼을 찌르는 듯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근데, 왠지 야마슈 보면 열 받지 않아?” 주변에 있던 아이들 모두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한 사람이 ‘그치!’ 하고 동조하자, 안심했다는 듯 ‘응’, ‘진짜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고 각자 한마디씩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소년뿐이었다.
“뭐, 고지한테는 미안하지만.”
도야마는 한쪽 손으로 미안하다는 포즈를 취하고는 웃더니 살짝 덧붙였다.
“야마슈한테는 지금 한 얘기 말하지 마.”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야마슈와 세트가 되어버린다.
“야마슈 초등학교 때도 살짝 왕따당했었대.” “아, 알아, 그런 캐릭터야?” “목소리가 짜증 나.” “자기가 잘난 줄 알잖아, 걔. 기분 나빠.” “왕따시켜 버릴까?” “그러다 큰일 난다니까.” “거짓말이지롱.” “뭐, 하지만 엄청 짜증나는데, 걔.”
도야마가 소년을 다시 돌아보고 말했다.
“스파이짓 하지 마, 고지.”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다. 가벼운 농담이었다. 하지만 그게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모른다. 소년은 당황해서 말했다.
“나도 걔 엄청 열 받아.”
한 마디로는 모자라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왕따시키자, 야마슈.”
다들 일제히 술렁거렸다.
“뭐, 고지가 그렇게 말한다면 같이 해줄 수 있지.”
도야마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등줄기가 다시 서늘해졌다. 주범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할 일을 마친 야마슈가 교실로 돌아왔다. 소년을 발견하자 늘 그랬듯이 “고 짱, 고 짱” 하고 다가왔다. 도야마와 그 일행이 소년을 봤다. 싱글싱글 웃으며 시험하듯이 쳐다봤다.
“고 짱, 아까 복도를 걸어오는데…….”
“시끄러워, 너.”
고지는 까랑까랑한 야마슈의 목소리를 중간에 끊으며 말했다. 놀란 야마슈의 어깨를 밀쳐냈다.
“저쪽으로 가, 멍청아.”
허를 찔린 야마슈는 뒤에 있는 책상 위로 쓰러졌다.
“죽어, 새끼야…….”
소년은 그렇게 내뱉고 성큼성큼 걸으며 자리를 떴다. 도야마와 친구들도 뒤따라왔다.
“고지, 꽤 하는데.”
누군가 말했다. 그걸 듣고 안심한 자신이 나중에는 엄청 한심하게 느껴졌다.
눈을 떴다. 수화기 액정 화면에 ‘사용 중’이라는 표시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긴 통화다. 이렇게 긴 통화라면 아버지나 어머니의 친구한테서 온 전화일지도 모른다.
소년은 몸을 일으키고 침대 바로 옆에 있는 ‘고지’를 안아 들었다. 뒷다리가 길고 두껍기 때문에 엉덩이를 밑으로 하면 안기 수월하다. 모르는 집에서 모르는 인간에게 안겨 있는데 ‘고지’는 얌전하다. 사료를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어머니가 “대단하다”라고 감탄할 정도로 손이 가지 않는다.
“블랭킷 캣은 머리가 좋고 성격도 좋아야 할 수 있어.”
점장이 자랑했던 것처럼 맹크스 중에서도 고지는 우등생일 테지.
-꼬리가 없는 블랭킷 캣

할머니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늙어버렸다. 얼굴을 보는 건 정월 이후로 8개월 만이었지만 몇 년치 나이를 한꺼번에 먹어버린 것 같았다.
몸이 줄어들고 얼굴은 주름투성이가 되고 머리숱은 적어지고, 다리도 가늘어지고……. 무엇보다 눈이 안 보인다. 현관에서 거실로 들어올 때도 아버지가 할머니 어깨를 안고 손을 잡아 부축했다.
이제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롱롱 대역의 정체가 적어도 줄무늬 때문에 들통날 일은 없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은 할머니는 냥, 하고 울면서 다가오는 롱롱을 기쁘다는 듯이 무릎에 앉혔다. 롱롱의 연기도 훌륭하다. 물론 본인은 연기하려고 하는 게 아니겠지만. 게다가 ‘본인’이라는 말도 이상하지만.
뭐, 어쨌든 롱롱의 대역과 할머니와의 만남은 순조로웠다.
“낯가리는 고양이는 블랭킷 캣이 될 수 없습니다.”
과연 애완동물 대여점 점장의 말 그대로였다.
“오늘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은어를 조릴 거예요.”
어머니가 말했다. 달달하게 만든 은어 조림은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턱이 약해진 할머니를 위해서 평소보다 더 시간을 들여 부서질 정도로 부드럽게 쪘다. 무엇보다 입을 귀 근처에 가져다 대고 몇 번씩 반복해서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할머니를 보고 있으려니 더 이상 저녁 밥 메뉴를 뭘 해야 하나 고민할 단계가 아닌 것 같았다.
할머니가 처음 왔을 때는 시끌벅적했던 거실도 곧 조용해졌다. 할머니는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고, 할머니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큰 목소리로 단순하게 천천히 하려면 왠지 묘하게 지쳐버린다.
어머니는 저녁 준비를 구실로 부엌으로 들어가 버리고, “짐, 놓고 올게” 하고 거실 옆 다다미방으로 들어간 아버지도 “텔레비전 잘 나오는지 봐야지”라고 잘 들리지도 않게 말하더니 텔레비전 스위치를 켜고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거실에는 나밖에 남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나까지 나가는 건 좀 그렇고, 남동생은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려면 멀었고…….
“할머니.”
말을 걸었다. 할 말이 있었던 건 아니고 침묵의 무게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할머니는 롱롱을 무릎에 안은 채로 ‘뭐?’라고 묻듯이 돌아봤다.
“저기…… 어, 음, 뭐라고 하지……. 오랜만이지?”
당연하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살며시 웃었다.
“롱롱 귀엽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할머니는 미소를 지은 채로 롱롱의 등을 쓰다듬었다.
“작년이랑 똑같지? 롱롱.”
스스로 무덤 파지 마.
할머니의 반응은 없었다. 딱히 맞장구를 칠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애초에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도 저녁 준비 도울게!”
조금 안심하고 긴장이 풀리자, 갑자기 불안해져서 아이 같은 말투로 말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도망친 것 같은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왜 여기 왔어?”
부엌에서 시금치로 나물 무침을 만들고 있던 엄마는 나를 탓하듯이 물었다.
“저녁은 엄마가 하면 되니까, 넌 할머니랑 같이 있어.”
치사하다.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보리차를 꺼내 유리컵에 따랐다. 보리차의 계절도 곧 끝이다. 할머니는 내년의 보리차를 마실 수 있을까.
엄마는 다 삶아진 시금치를 꼭 짜서 물기를 없앤 뒤 한숨을 쉬며 말했다.
“큰아버지 집에서도 힘들었나 봐.”
“…… 뭐가?”
“예를 들면 아래 일이라든가. 그런 거.”
“소변 같은 거?”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시금치를 도마에 올렸다.
“‘큰일’도?”
대답 대신 시금치를 써는 식칼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다른 건?”
나는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가끔씩 오락가락하나 봐.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누군지……. 큰아버지가 맡았을 때는 밤중에 배회한 적도 있었대.”
맡았다, 라는 말에 약간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거기에 발끈하는 건, 책임지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입바른 소리라는 것 정도는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할머니, 요양원에 들어가는 거 받아들이실까?”
“……글쎄.”
큰아버지가 조리 있게 설명하면 제대로 이해하셨다. 더 이상 혼자서 사는 건 위험하고, 그렇다고 세 자식들 집 중 어디에서도 같이 살 수 없다. 잘 알고 계셨다. 요양원의 팸플릿을 보거나, 미리 요양원에 갔을 때는 “친구 많이 사귈 수 있겠네” 하고 긍정적으로 말씀하기도 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할머니는 사람이 변한 것처럼 큰아버지를 비난하며 요양원 같은 곳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 자신을 버리겠다면 이 집에서 죽고 평생 저주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대역을 맡은 블랭킷 캣

“나, 고양이는 다 엄청 좋아하는데.”
에쓰코는 이렇게 덧붙이며 무릎 위에 있는 아기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어젯밤 주워왔다. 종이 상자 안에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데려가길.’ 가만히 생각해보면, 버린 사람이 적어놓은 메세지는 말도 안 되게 뻔뻔하고 제멋대로다.
“키울 거야?”
내가 묻자, 에쓰코가 조금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그럴 수 있으면.”
“이 방, 애완동물 키워도 괜찮아?”
“……안 돼.”
“그럼 어떡할 거야?”
“음…….”
“가능하면 다쓰, 네 방에서 맡아줬으면 하는데…….”
“그건 절대 안 돼.”
“나도 같이 살 테니까.”
“안 된다니까.”
나는 딱 잘라 대답하고 내 목소리를 확인한 뒤, 에쓰코를 돌아봤다.
“뭐?”
에쓰코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말한다.
“뭐, 결혼이라든가, 그런 건 아직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지만, 너랑 같이 사는 건 괜찮을까, 하고.”
“……진짜?”
“그렇다니까…….”
에쓰코의 볼이 빨개졌다.
“너도 그게 좋지?”
응, 응, 응, 하고 용수철 달린 인형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훠어, 하고 나도 모르게 만세까지 해버렸다.
길거리에서 헌팅해서 사귀기 시작하고 반년, 사소한 싸움을 몇 번 하기는 했지만 나는 줄곧 에쓰코만 바라봤다. 그 마음이 지금에야 결실을 맺은 것이다. 하지만 만세를 연창하는 나에게 에쓰코는 불쑥 말했다.
“근데…… 너희 맨션도 고양이 안 되는구나…….”
“자, 잠깐만. 괜찮아. 어떻게든 할게.”
“어떻게든, 이라니?”
“그러니까…… 주인집 영감을 죽인다든가…….”
“바보야.”
에쓰코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다. 그렇지만 만약 혹시라도 에쓰코가 “죽여”라고 진심으로 말한다면, 난 칼을 샀을지도 모른다. ‘여자 때문에 신세 망친다’라는 말의 의미를 요즘 절실히 깨닫고 있다.
“이 방에서 같이 살든가.”
“그럼, 나 이사할까?”
“하지만 애완동물을 키울 수 있는 맨션이나 아파트가 별로 없어. 있어도 집세가 비쌀 테고.”
“……음.”
“다쓰, 너 돈 있어?”
나는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스물다섯 살이 되었는데도 프리터다. 낮에는 빌딩 청소 일을 하고, 편의점 심야 근무를 병행하며 어찌어찌 지금의 맨션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파견 근무가 한 달에 3분의 1정도밖에 없는 에쓰코도 돈에 여유가 없을 것이다. 둘이서 집세를 반씩 낸다고 해도 엄청 싼 지금 맨션과 같은 수준의 집에 사는 것은 아마도 무리다.
-미움받는 사람의 블랭킷 캣

인간 같은 건 별거 아닌 녀석들이다.
새끼 고양이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머리가 좋았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성격이기도 했다. 덕분에 2박 3일 동안 같이 지낸 주인에게 정이 들어서 이별이 쓸쓸한 적도 없고, 인간이 좋아하는 몸짓이나 울음소리도 잘 알고 있고, 이건 일이라고 딱 구분지어 애교 있게 행동하는 법도 알았다.
대여 고양이의 일에 익숙해지지 않는 동료들에게는 진심으로 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준다.
이 일은 말하자면 ‘놀이’이다. 손님은 3일 동안만 자기 집에서 고양이와 함께하는 생활을 즐기고 이쪽은 잠시 동안 집고양이의 편안한 생활을 즐긴다. 그것뿐이다. 환경의 변화도 물론 스트레스이고, 변변치 않은 손님을 만나면 고생도 는다. 하지만 불평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애완동물 대여점에서 팔다 남은 애들의 말로末路는……. 누구도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태비는 대충 짐작하고 있다.
우리는 운이 좋았어.
그 행운을 행복으로 만들면 돼. 주어진 일을 잘하면 먹을 것과 잠잘 공간은 보장된다. 그걸로 됐다. 그것만으로도 좋다. 많은 걸 바라지 마. 인간에게도 인간의 사정 때문에 여행을 하는 자신에게도.
“다른 색은 없어요?”
누님은 껌을 짝짝 씹으며 말했다. 씹던 껌 조각을 모르고 먹어버린 동료가 똥이 배 속에 차서 심한 일을 당한 게 바로 지난달이었다.
이번 주인은 꽝이다. 키우는 방식이 엄청 엉망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예를 들면 건사료에 우유를 부어준다든지, 엄청 싫은 목욕을 시킨다든지, 그 뒤에 드라이어의 뜨거운 바람을 가까운 거리에서 쏘인다든지…….
실버 클래식 태비인 고양이가 있기는 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저번 주부터 감기 기운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다. 가게의 점장도 가능하면 빌려주고 싶지 않을 테고, 이런 손님이라면 만에 하나 불행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다시 돌려보내져서 아픈 동료를 데려가게 할 정도라면 얼른 이야기를 끝내는 편이 좋다.
저런, 저런, 태비는 고개를 들고 누님을 바라보았다. 누님의 몸 덕분에 햇빛이 가려졌다. 눈이 부셔서 동공이 가늘어질 때보다 약간 어두운 곳에서 동공을 동그랗게 하는 편이 인간에게는 잘 먹힌다는 걸 태비는 잘 알고 있다.
태비는 꼬리를 세우고 누님에게 몸을 비볐다. 냥, 하고 가볍게 우는 목소리도 냈다.
“뭐야, 이 녀석 나한테 애교 부리잖아.”
누님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점장이 말했다.
“사람을 잘 따라요.”
그러자 누님은 알겠다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손님을 잘 따르는 것 같으니…….”
점장은 조금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태비가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한 번 더 울자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대여 신청서를 접수했다.
태비는 안아 들려고 하는 누님의 손을 슬쩍 빠져나와 자기 스스로 바구니로 들어갔다.
“짱이다. 혼자 들어가네? 대박.”
“이 녀석, 머리가 좋아요.”
그렇다. 태비는 블랭킷 캣 중에서도 월등히 우수한 고양이다. 그래서 사실은 가끔씩 생각한다. 쿨하게 요령 좋게 행동하면서도 문득 그늘진 말이 흘러나온다.
나는 대체 뭘 위해서 사는 걸까?
-여행을 떠난 블랭킷 캣

“못 키워?”
요타도 처음에는 납득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2박 3일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잖아?”라고 류헤이가 말하자 “뭐, 그렇지” 하고 받아들였다. 어차피 이번에 이사 가는 아파트에서는 고양이 같은 건 키울 수 없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집에서의 마지막 추억이니까. 내일은 비디오라든가, 사진 많이 찍어두려고.”
아, 맞다. 배터리 충전해둬야지, 라며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마치 카운터펀치처럼 하루에의 목소리가 귀에 날아와 박혔다.
“그거, 누굴 위해서야?”
“응?”
“마지막 추억이라니……. 누구를 위해서 마지막 추억을 만들려고 하는 거야?”
그야, 당연히…… 하고 대답하려는데 다시 카운터펀치가 날아왔다.
“당신을 위해서지?”
“아니야, 무슨 소리야. 나는 요타랑 미유키가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하니까, 그래서 마지막이니까 이렇게…….”
“그럼, 미유키가 좋아했어?”
삼연발 카운터펀치.
말문이 막혔다. 좋아하고 뭐고, 결국 한 번이라도 대화를 하기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미유키는 이층으로 올라가고 말았다.
“내일모레 고양이 돌려주러 갈 때 요타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아빠가 좋은 추억을 만들어줬다, 고맙다…….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아?”
이번에도 대답할 말이 없다. 아무 말이 없는 류헤이에게 하루에는 따지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저기, 나 생각해봤는데 추억이라는 건 억지로 만드는 게 아니잖아? 마지막이니까 즐거운 추억을 남기자, 라니 그런 건 어른들의 쓸데없는 오지랖이잖아? 고양이를 키우고 싶지만 키울 수 없었다. 그걸로 됐잖아. 그런 것도 추억이잖아.”
“……하지만 부모로서 꿈을 이뤄주고 싶었어.”
“정말로 고양이를 키운다면 말이 되지. 하지만 빌리는 거라면 꿈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잖아.”
“그건, 뭐, 그렇지만.”
“어중간해, 오히려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고……. 이렇게 말하면 화낼지도 모르겠지만, 뭔가, 되게 당신의 자기만족이라는 생각이 들어.”
말이 귀가 아닌 가슴에 박혀 찌른다. 반박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가슴과 목 사이에 무언가 딱딱하고 무거운 것이 꽉 막혀버려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하루에가 나직이 말했다.
“저녁에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어.”
이 집의 매매 가격 사정에 관한 일이었다.
“2천 2백만 엔, 어떻대?”
“그건 이미 처음부터 완전 억지라고.”
“……얼마였어? 사정 결과는?”
“1천 8백만 엔도 조금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그 자식은 얼마면 팔 수 있다고 하는 거야?”
무심결에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런 격양된 감정도 전부 흡수한 듯이 하루에의 목소리는 냉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루에는 류헤이가 열심히 쌓아올리고 필사적으로 지켜온 ‘한 나라의 성’의 가격을 알렸다.
“1천 5백만 엔으로 내놓으면 1천 3백만 엔으로 살 사람이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이고…… 1천 2백만 엔까지 내릴 수 있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느냐고.”
-우리 집 꿈의 블랭킷 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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