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
화폭에 담은 영혼, 초상화
”영혼을 들여다볼 수 없다면 초상화가 아니다“
윤두서, 이명기, 김홍도 등 조선시대 초상화가들이 일궈낸
우리식 리얼리즘과 근대성,
중국이나 일본, 서양식 초상화와 구별되는 조선만의 초상화법을 밝힌다!
미술사가 이태호 교수가 옛 초상화에서 찾아낸 우리 얼굴의 아름다움
미술사가이자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인 명지대 이태호 교수가 조선 후기 초상화의 사실적 표현과 근대성을 연구한 신간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 조선 후기 초상화와 카메라 옵스쿠라』를 출간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근현대회화까지 한국회화사 전반에 걸쳐 폭넓은 관심을 가져온 저자는 최근 초상화, 진경산수화, 풍속화 등 조선 후기 회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러한 연구성과는 이 책과 함께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 풍속화를 다룬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옛 화가들은 우리 삶을 어떻게 그렸나』의 3부작으로 출간될 계획이다.
조선시대는 초상화의 시대라고 이를 정도로 한국미술사에서 초상화가 가장 많이 그려진 시대이고 예술적으로도 수준 높은 명작들이 쏟아졌다. 이 책은 조선시대 특히, 조선 후기 초상화가들이 사실성을 추구하고 원근법을 표현하기 위해 광학장치인 카메라 옵스쿠라를 활용해 초상화를 그렸다는 단서를 정약용의 문헌기록과, <채제공 초상> <이기양 초상> 등의 초본과 정본을 면밀히 분석해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외모를 닮게 하면서 대상인물의 정신까지 그린다는 전신론傳神論, 그리고 뒷면에서 그려 화면의 앞면으로 우러나온 색채를 활용하는 배채법 등의 사실적 묘사기법을 밝혀 조선 후기 문화사에서 우리식 리얼리즘과 근대성을 찾을 수 있는 고전적 전범과 중국이나 일본, 서양식 초상화와 구별되는 조선만의 초상화법을 설명하고 있다.
인물의 정신까지 그리는 전신론傳神論
조선시대 초상화는 ”터럭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다“라는 관념 아래 사실 묘사의 ‘진실성’을 가장 큰 미덕으로 삼았다. ‘초상’은 외모를 닮게 하면서 대상인물의 정신까지 그린다는 뜻으로 ‘전신傳神’이라 일컬었다. 심지어 너무 사실적이어서 검은 반점, 마마자국, 피부가 하얗게 변하는 백반증 등 주인공 얼굴의 약점까지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묘사해놓았다. 심지어 조선시대 초상화를 자료로 삼아 피부병 관련 질병을 연구한 의학계의 논문이 나올 정도이다. 이에 자극을 받아 중국과 일본의 의학자들이 자국의 전통 초상화를 조사했지만 우리나라처럼 사실적인 예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는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얼마나 ‘대상인물이 지닌 진실성’ 표현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짐작하게 한다.
카메라 옵스쿠라의 활용과 근대적 사실정신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는 말 그대로 ‘pin-hole black box’로 ‘어두운 방’ 혹은 ‘어둠상자’이다. 어둠 속에 바늘구멍으로 들어온 빛을 따라 일정한 거리에 벽면이나 흰 종이를 갖다놓으면, 그 스크린에 바깥 풍경과 물상들이 거꾸로 비치게 되는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1830년대까지 카메라 발명에 앞서 사용되던 광학기구이다. 15,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 화가들 가운데 원근법과 입체감 곧, 대상을 정확히 읽고 묘사하기 위해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하고 개발했는데, 그런 광학기기가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왔다. 카메라 옵스쿠라의 수입은 김홍도나 이명기처럼 묘사기량이 탁월한 화가들의 출현시기와 맞물려 조선 후기 초상화의 사실성을 한층 높이는 데 일조했다.
대상과 꼭 닮은 이미지를 카메라 옵스쿠라의 뷰파인더에서 눈으로 확인한 일은 당시 화가들에게 충격적이라고 할 만큼 새로운 자극이었을 것이다. 김홍도나 이명기처럼 특히 대상을 닮게 그리려는, 재현의지를 지닌 화가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사신 일행으로 북경을 여행하면서 그런 체험을 갖기도 했고 조선 후기 회화를 '과학적 사실주의' 경향으로 볼만한 수준으로 이끌었다.
카메라 옵스쿠라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정약용, 이규경, 최한기, 박규수 등 조선 후기 학자들의 기록에서 발견된다. 가장 이른 기록은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카메라 옵스쿠라에 대한 정약용의 증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신이 직접 실험한 ‘캄캄한 방에서 그림 보는 이야기’인 「칠실관화설漆室觀畵說」인데, 이 글은 카메라 옵스쿠라로 풍경을 감상한 내용이다. 또 하나는 「복암 이기양 묘지명」에 밝힌 대로 “이기양이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의 집에서 칠실파려안漆室??眼 곧, 카메라 옵스쿠라로 초상화를 그렸다”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카메라 옵스쿠라를 본격적으로 사용해 인물화와 풍경화를 그렸을 16~19세기 서양회화사에서 카메라 옵스쿠라를 활용하였다는 증거나 기록을 남긴 사례는 거의 없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정약용이 카메라 옵스쿠라를 실험하고 그것으로 초상화를 제작했던 증거를 구체적으로 남긴 일은 세계과학사나 회화사에서도 소중한 기록이다.
우리 얼굴의 피부색을 표현한 배채법背彩法
배채법은 뒷면에 채색을 해 앞면에 그것이 반투명 상태로 비치게 하는 방식이다. 배채는 물감의 얼룩이나 변색, 박락剝落을 막아주는 데 효과적이고, 얼굴의 미묘한 살색을 내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법이다. 중국의 양면착색법은 발색을 선명하게 내기 위해 주로 쓰였지만 고려 불화나 조선시대 초상화의 배채법은 얼굴의 살색이나 흰옷 부분을 은은하게 드러내기 위해 부분적으로 쓰였다. 뒷면에서 그려 화면의 앞면으로 우러나온 색채를 활용하는 배채법은 유화나 수채화 같은 서양회화에서는 불가능한 기법이다. 캔버스나 면지가 두껍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채는 동양회화의 재료가 비단이나 종이여서 개발된 화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배채는 동서양회화의 차이를 여실히 대변한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서양그림이 눈에 든 대로 그리는 일을 중시한 반면, 배채는 대상의 내면을 중시하는 동양화론과 함께하는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즉, 배채법은 겉으로 드러난 외양만이 아니라 대상인물의 속내인 정신을 담아내야 한다는 전신의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