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소개
이근영(李根榮, 1909∼?)은 1909년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현재 군산시에 편입)에서 농사를 짓던 이집찬(李集瓚) 씨와 어머니 고성녀(高性女) 씨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작고해 어려운 형편 속에서 자란 이근영은 소학교를 마치고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이사한다. 유년기를 보낸 옥구의 전원 마을은 이근영 농촌소설의 자양이 된다. 근영의 형이 큰댁으로 입적(入籍)된 탓에 근영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은 자별했다. 서울 중동중학을 거쳐 1931년 보성전문에 입학, 3년 뒤인 1934년 졸업 뒤에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해 1940년까지 6년 동안 근무한다. 보성전문 재학 중에 만난 두 살 연하의 숙명여전 김창렬(金昌烈)과 수많은 일화를 남기는 열애 끝에 결혼했으며, 그 사이에 7남매를 낳았다. 이근영은 1935년 동아일보의 자매지 ≪신가정≫에 단편 (금송아지)를 발표하면서 작가로 등단한다. 이후 (과자 상자)·(농우)·(말하는 벙어리)(1936년), (당산제)·(이발사)·(최고집 선생)·(적임자)(1939년), (탐구의 일일)·(고향 사람들)·(고독의 변)(1940년), (밤이 새거든)·(소년)(1941년) 등의 단편과 장편 ≪제삼노예≫(1938년) 등을 발표한다. (동아일보) 폐간 이후 ≪춘추≫ 편집 동인으로 활동했고 서울에서 교편을 잡은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1943년 작품집 ≪고향 사람들≫(영창서관)을 발간했다. 해방 직후 박헌영 계열의 (해방일보)에 참여했고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해 농민문학위원회의 사무장을 맡아 일했다. 이 무렵 단편 (추억), (장날), (고구마), (안 노인), (탁류 속을 가는 박 교수) 등을 발표한다. 1950년 9월 가족들을 솔거해 월북했으며, 이후 종군기자로 참전한다. 월북 이후 단편 (고향),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와 중편 (첫 수확)을 발표했으며 1957년에는 소설집 ≪첫 수확≫을 간행했다. 월북 이후의 경력으로는 1954년 작가동맹의 상무위원, 1955년 작가 대표, 1967년 직업총동맹 평남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50년대 이근영은 소설가로서보다 언어학 연구자로서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1980년 말까지 40여 편의 언어학 논문을 남긴 바 있다. 장편 ≪청천강≫과 ≪별이 빛나는 곳≫을 1960년대에 출간했으며 이 무렵 ‘우산장 창작실’에 속해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1980년 말까지 발표 논문 실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80년대까지는 생존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