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골목에 탐닉한다
골목,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 그곳은 추억이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의 추억이 있다. 해질녘 골목을 타고 흐르던 저녁 밥 짓는 냄새, 그리고 어머니가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 <나는 골목에 탐닉한다>의 저자 권영성은 그 시절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대한민국의 40대 가장이다. 골목에서 친구를 사귀고, 골목에서 성장하고, 골목에서 정을 나눈 세대의 이야기. 그래서 그의 골목 기행에는 정겨움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언제나 오랜 친구처럼 따뜻하고 반갑지만, 동시에 재개발의 미명 아래 예전 모습이 거의 사라지고 흔적만 남은 골목들에선 그 시절의 아름다움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
그렇게 사라져가는 골목들을 지켜보던 저자는, 결국 아쉬운 마음에 카메라를 들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쏟아낼 수 있는 언어와 프레임으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 자신만의 블로그에 하나둘 채워갔다. 이제는 자취를 거의 감춘 피맛골, 재개발을 기다리는 북아현동, 그리움으로 영원히 기억될 회현동, 가난했지만 정겨웠던 인천 송현동의 달동네…. 이미 사라졌거나 곧 사라지게 될 그곳들의 흔적이 한 권의 책이 되었다.
도시를 산책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
똑같은 공간이라도 일 년 전의 풍경이 다르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풍경이 다르며, 보는 이의 감정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공간이 또 누군가에게는 그저 스쳐가는 공간으로 다가온다. 바쁜 일상 속에서 그렇게 우리는 숱한 골목들을 무심히 지나치고, 가장 가까운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기회조차 흘려보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에게는 모든 거리, 골목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그는 도시를 산책하는 아름다운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말이 되면 아들과 함께 골목길을 걷고, 출장길에서는 낯선 도시의 새로운 골목을 찾아다니며, 오랜만에 만나는 죽마고우와의 약속 장소마저 추억이 녹아든 골목길로 정한다. 함께 골목을 걷는 사람들과 정을 나누고 골목 안 사람들의 자글자글한 삶을 들여다보는 동안, 좁은 골목길은 도시의 훌륭한 산책로가 된다.
오사카로 출장을 가면 늘 같은 호텔에 머물고 아침식사 전에 그 근처를 산보하곤 한다. 산보는 그날 기분에 따라 방향을 정해 한 시간 정도 걷는다. 이렇게 상쾌하게 산보를 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왠지 일도 순조롭게 풀리는 것 같다.
- p. 78 “오하이요 고자이마스!” 중 -
이제는 골목길을 즐기기 위해 걷는 것 같다. 길을 바꿔가며 걷는 노하우도 생겼다. 출근길 시장에서 만나는 상인들의 활기찬 모습, 퇴근길 골목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의 즐겁게 뛰노는 모습, 그리고 골목 어귀 구멍가게 앞 평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님들의 정겨운 모습을 보면 어느새 마음이 흐뭇해진다.
- p. 231 그 시절 이웃들은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중 -
골목 안 풍경은 지구 위 어느 곳이나 닮아있다
화려한 야경을 자랑하는 밀라노, 황제의 도시 인스부르크, 예술의 도시 파리, 중세의 풍경을 간직한 로텐부르크,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중국 포산의 황치…. 나라와 도시는 다르지만 골목 안 풍경은 우리네 골목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일상의 냄새를 풍기고 정을 나누며 아이들이 자라나는 곳은, 세계 어디에서나 ‘골목’이라 불린다. 어떤 골목들은 하얀 빨랫감이 마르는 풍경이 서로 닮아있고, 또 어떤 골목들은 창틀에 내어놓은 작은 화분의 싱그러움이 비슷하다. 노부부의 다정한 뒷모습이 정겹고, 낯선 이를 향해 손짓하는 순박한 사람들의 마음이 고맙다. 그러한 ‘풍경 속 풍경’들은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같은 모습이다. 저자는 바로 그것들이 그리워 국내외의 골목들을 그토록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길 양옆에 늘어선 집들에는 창문마다 색색의 고운 꽃과 고풍스런 소품들이 놓여 있었다. 돌의자에 놓인 꽃들이 지나는 이들을 예쁜 웃음으로 반기고 있었다. 그 모습에 오상이도, 수연이도, 나도 모두 즐거워졌다. 어느 집 계단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의 모습이 행복하게만 느껴진다.
- p. 242 중세에서 멈춘 시간 중 -
꽃으로 장식된 어느 오래된 집에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할머니나, 골목골목을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에서는 행복이 느껴진다. 눈을 다시 뜨고 부드럽게 휘어진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때론 이렇게 이리저리 휘어진 골목의 선을 따라 걷다가, 갈림길에선 마음 가는대로 선택해 걸어본다.
- p. 258 고여 있는 풍경에 물들다 중 -
<나는 골목에 탐닉한다>을 읽고 나면 서둘러 길을 나서야 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 같은 곳, 변함없이 우리를 반겨 줄 것이라 믿었던 골목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가슴으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 안의 이야기들마저 사라지기 전에 그곳을 추억하려고 카메라를 챙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