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변경선
작가는 단순히 글을 쓰는 자가 아니라 자기 내면에 있는 미지의 것을 끌어 올리는 자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의 힘은 작가에게 단순한 도구나 수사가 아니라 본질이다. 작가 전삼혜는 예리하게 파고드는 날카로운 메스를 가졌다. 그는 그 메스로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미지의 전율을 끌어 올릴 것이다._김진경(동화작가, 시인)
제8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전삼혜의 첫 청소년소설
백일장 키드가 묻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신예작가 전삼혜는 탁월한 문장력과 서정적 감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의 작품은 잔잔한 수평선 같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묘사와 플롯이 숨어 있다. 물 흐르듯 유유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주인공의 삶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이번에 선보이는 『날짜변경선』은 문학소년, 소녀 들이 백일장을 다니면서 서로 관계 맺는 법을 배워나가는 모습, 더 나아가 꿈과 진학에 대해 고민하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이 담긴 장편소설이다. 단순히 간접 경험이나 상상만으로 써낸 것이 아니라, 작가의 경험이 절절하게 배어 있기에 작품 속 인물들의 아픔과 환희가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치기 어린 문청 시절의 절절함을 욕심내어 담고 싶었을 법도 한데, 작가 전삼혜는 본인이 하고자 한 이야기를 흔들림 없이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갔다.
‘백일장 키드’로 살고 있는 『날짜변경선』의 현수, 우진, 윤희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평론가 유영진의 말처럼 이 질문 속에는 글쓰기 자체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담겨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글쓰기 출현을 예감하게 한다. 문학과 동떨어져 사는 청소년이라 해도, 이 작품을 만난다면 문학이란 틀을 넘어서 자신의 삶 자체에 대한 자신만의 질문을 만들고 싶을 것이다.
좋은 것과 싫은 것이 분명할 수 있다면
나는 수학이 아무리 싫었더라도 이과를 갔을 것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현수는 백일장을 찾아다닌다. 평일에는 학교를 결석해야 하는데, 일반 입시 위주인 고등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공결’ 즉 공식 결석을 신청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때마다 담임의 잔소리도 피할 수 없다. 부모 역시 현수가 문과를 선택하고, 백일장 순례를 생활화하는 것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다. 하지만 현수는 자신도 모를 어떤 마음에 이끌려 포기하지 못한다. 왜 문학이 좋은 것인지, 왜 문학을 선택한 것인지 현수 자신도 대답할 수가 없다.
K대 백일장 갈 것 같아요. 혼자 밥 먹는 게 지겨워요.
마주 앉아서 같이 먹어 줄 사람 찾습니다.
현수는 백일장에 가서 혼자 밥을 먹고, 소득 없이 집에 돌아오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데 문득 그 일상이 너무도 외롭게 느껴진다. 백일장 키드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정보를 공유하는 카페 ‘날짜변경선’은 늘 시끄럽다. 말수 적은, 그저 평범한 현수는 그 온라인 공간 안에서조차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그런 현수가 용기 내어 카페에 글을 올린다. 같이 밥 먹어 줄 사람을 찾는다고.
얼마 뒤 동갑 여학생 ‘이한솔’에게서 댓글을 받는다. 이한솔에 대한 현수의 설렘과 기대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리고 K대 백일장에서 이루어진 이한솔과의 만남. 현수는 충격에 휩싸여 말문이 막힌다. 이한솔이 진짜 이한솔이 아닌, ‘김윤희’였기 때문에.
내일이 아닌 오늘, ‘미안해’라는 말을 들어서 다행이야.
그 말에 담긴 질감과 습도와 온도를 기억할게.
날짜변경선 카페에서 만난 현수의 유일한 말벗 우진. 현수는 우진과 윤희의 관계를 알기에, 두 사람 중 누구에게도 솔직해지지 못한다. 문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서로의 아픔과 외로움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사이지만, 그들은 너무 멀리 살았고 다르게 살고 있다. 왕따의 아픔을 문학으로 치유하고 있는 윤희,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문학을 움켜쥐고 있는 우진. 한때 우진은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윤희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현수, 우진, 윤희는 학교 시험과 백일장 일정으로 숨 돌릴 틈 없이 한 학기를 보낸다. 그리고 8월 14일 밤, 원주에서 있을 백일장 전날, 세 사람은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의 한 공간에서 마주한다. 8월 15일이 되기 바로 전, 윤희의 생일에 우진의 사과는 간신히 윤희에게 전달된다. 우진의 ‘미안해’는 아주 긴 시간을 거쳐, 어쩌면 지구를 한 바퀴쯤 돌아, 일 년이 지나 윤희에게 도착한 것이다. 세 사람은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서로에게 천천히 다가서며, 글로만 나누었던 마음을 ‘말’을 통해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손을 내민다.
내가 넘어가려고 한 것은 내 키보다 높은 벽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경계가 아니었을까.
현수는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그리고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찾는다.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어떤 벽 앞에서 처음으로 ‘넘어가고 싶다’는 마음을 간절하게 느끼고, 정말로 글이 쓰고 싶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넘어갈 수 있는 그 경계. 그 경계 앞에서 현수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올곧은 마음으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려 한다. 우진과 윤희 역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로를 선택한다.
백일장 이야기와 문학소년, 소녀 들의 애환이 녹아든 작품이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펼쳐내 보이는 주인공들을 통해 입시 제도에 갇혀 사는 요즘의 청소년들도 느끼는 바가 클 것이라 기대한다. 높은 벽과 위태로운 경계선 앞에 서 있다 해도,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원하는 길을 꿋꿋이 택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스스로를 믿고 그 길을 가보는 것이야말로 젊은 날의 특권일 것이다.